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찮은 기회로 작가인 박범신을 만날 수 있었다. 공자가 말하는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색, 모방, 경험의 길이 있는데 경험만이 나, 자신만을 의지해야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습관에 의한 경험, 그리고 의지 따위는 있겠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곳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촐라체를 향한 그러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내게 속삭여주었다.

CHOLATSE :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미터 봉우리,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

왜 젊은이인가. 왜 이렇게 단정지어 놓았을까, 라는 의문이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박범신은 우리에게 불행하다고 말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해도 벌써 과거의 사람들이 발을 디디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며 새로운 일을 하려 해도 미리 이루어 놓은 과거의 것들이 우리를 조여올 것이라고. 어느새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같은 생각을 전에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Cinema paradiso>를 보면서의 일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야외의 큰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앉아서 영화를 보면서 웃고 떠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영화를 보려 하면 사전의 정보나 그리고 제한되어 있는 시스템 속에서 나는 나의 감정을 제약받는다. 하지만 그때라면 어땠을까. 어떤 영화인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채 그 열린 공간 속에서 나만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오로지 나의 진실된 모습일 것이다. 

촐라체, 그 빙벽에 서로 로프로 이어진 박상민과 하영교. 그들은 고요하여 정적마저 감도는 그 벼랑 끝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느낀다. 바람 하나 불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곳에서는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어떠한 방해물 없이 자신만을 위해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로프로 이어진 그 둘은 어느새 서로간의 소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저 산을 오르고, 험난한 그 곳을 극복해가면서 이루어내는 승리와 환희에 대한 이야기라고 착각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뒤 떠오르는 나의 생각은 그저 극복해내고 이루었다는 승리의 소리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얼마나 고독했을까, 힘들었을까 라는 대상인 몸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을 극복해내가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스며든다. 젊은이에게 던지는 한마디, 도전해라. 끊임없이 나를 자극했다. 떨어져 죽을 것만 같은 그 곳, 하지만 떨어져 죽을 수는 없다. 떨어져 죽을 수는 없지만 죽을 것만 같은 그 정도의 모험을 감행해라. 

시점을 이리저리 달리하며 전개해 나가는 글을 읽으면서, 박상민과 하영교, 그리고 저 멀리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홀로 앉아 있는 그 세 사람. 떠나오기 전 수많은 고통과 뒷일을 내던지고 그들이 돌아섰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어쩌면 도피처였을지도 모르는 그 길에서 세 사람은 만나고 그리고 그 자체가 모험이 되어버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는 등정이 아니라 최소한의 장비로서 자기 몸의 감각에 의지해서만 오를 수 있는 알파인 등정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행하는 위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바치는 최소한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나를 알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를 알 것 같다고 또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나를 모른다. 아니, 어쩌면 평생 나를 안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한 생을 살면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인 내 삶과 씨름하며 고뇌하며 그리고 깨우치는 그 때를 위해 사는 지도. 

나는 떠나련다. 과거의 나를 떠나려고 한다. 무지하고 안일했던 나를 떠나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서 기대를 하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고 싶다. 쉴새없이 움직이고 싶어졌고, 그리고 머릿속 뇌의 주름이 조금씩 더 자글자글해 질때까지 생각을 하고 싶어졌으며 그리고 나만의 촐라체, 내 존재에 대해 묻고 싶어졌다. 내 속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아니 언제부턴가 내 눈 바로 앞에서 어물쩡거리면서 자기를 봐달라고 했는데 짐짓 내가 무시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촐라체를 눈앞에 두고 달려가려고 한다. 존재, 그 어두운 채 묻혀있는 보석을 이제 조금씩 캐내보려 한다.

 

p.51
밤은 이래서 좋다. 불빛과 불빛 사이에 아무런 절망적인 거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 따뜻한 착각.

p.226
모든 것은 유동적이지만 삼라만상과 과거 현재가 다 서로 얽혀 있으므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카르마 또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고통이야말로 '온갖 부정적인 카르마를 쓸어내는 빗자루'란 말도 그 원리와 맞닿아 있었다.

p.327
길은 결국 두 갈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의 길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일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안락한 일상을 버릴지라도 불멸에의 영성을 따라 이상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일 것이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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