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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ㅣ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무엇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자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조차, 나중에는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오지 않을까. 의아해하면서도 동시에 두렵다. 내 머릿속에 그리고 책상 위에 휘갈겨 쓴 메모지에 써있는 글자조차 없어져버릴까봐. 내가 메모를 했다는 그 자체도 잊어버리게 될까봐.
아버지의 실종, 그리고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물건이던 크세사노 황금 상, 그것을 받치고 있던 밑동까지 훔쳐갔다는 누명을 쓴 아버지. 하지만 남매, 엄밀히 말하면 쌍둥이인 제시카와 올리버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의 추궁, 아버지인 토마스 폴락이 어디에 갔는지 물어보지만 그 둘은 아버지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어쨋든 자신들의 아버지가 있었고 그 아버지가 현재 누명을 쓰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고는 옥상으로 올라간다. 소중한 것들이 가득 들어있을 것만 같은 궤짝을 열어본다. 그 곳에는 엄마의 빨간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머리핀들, 그리고 가죽으로 고급스럽게 싸여진 노트를 발견하게 된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노트를 펼쳐보았더니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일기장 안에서 발견된 이야기들은 아버지에 대한 음모와 연구를 했던 내용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실종과 누명에 대한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생각하고 아버지가 일했던 박물관으로 찾아갔다. 누명을 쓰고 좌천된 경비원으로서 일했던 박물관으로. 그곳에서 박물관 관장을 만나게 되고, 꺼림칙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장을 뒤로 하고 찾아간 곳, 이슈타르 문. 일기장을 토대로 그 곳이라면 무언가 일이 일어날 듯 했고 문이 열릴 때를 기다려 들어가려 시도했다. 그리고 동생인 올리버가 사라진다.
올리버가 사라짐을 통해서, 그리고 제시카가 완전히 자기 동생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는 것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동생에 대한 어제의 기억을 잊었다기 보다는 동생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기억. 박물관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이리암이라는 여자와 함께 제시카는 사라진 아버지와 동생 올리버 찾기를 시작한다. 해석하지 못한 쐐기 문자와 그 문자가 사라져가고 주위의 모든 기억과 메모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껴가면서.
박물관이라는 어쩌면 신비한 공간속에서 사람이 사라져버리고 이 모든 일들조차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이상한 일로 남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누가 훔쳐가지 않은 이상 그저 증발해버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기억에 의존할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은 사실일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의문점들과 함께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이 책은 읽는 내내 흥미롭다. 판타지라는 장르의 특성상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무한대라고 하지만 그 상상력을 100%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존재이다. 그저 현실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린다면 그 반대의 생각이 가능해진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가 있는거지. 머릿속은 정말로 무한한하고 투명한 공간이 가득하고 그 속에서 작가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박물관, 그리고 일상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갑자기 떠오르는 노래를 기억하려고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아무렇게나 적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종이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리고 "어제 여기에 뭐라고 적었었는데...."라는 기억조차 날아가버렸다. 나는 다시 번뜩이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틀전의 모습으로 되돌려져 있다. 나는 그렇게 계속 뒤로가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곤 달력의 시간뿐인 것일까. 어떻게 보면 섬뜩한 소재를 가지고 약간은 동화같은 모습으로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