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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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창 에쿠니 가오리에 빠져 있었던 때가 있었다. 아마 시작은 '웨하스 의자'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아니, 또렷이 기억난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에 지나치게 빠져들었으니까. 문체에 아주 깊게 파고들었으니까. 그녀가 써내려가는 짧은 문장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오랜만에 집어들게 된 <차가운 밤에>. 간결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듯한 그녀의 문체가 참으로 오랜만이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기나긴 이야기를 기대했나보다. 어디선가 한 가지 소재를 담고 있는 장편보다 짧은 단편들을 지어내기가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면서 그 말이 와닿는다. 한 맥락을 이어가는 여러 단편들을 써내려간다는 것. 좀처럼 마음속에 담긴 감성이 풍부하지 않으면 하지 못할 일이다. 단편들, 하나같이 약간은 서릿한 기운을 담고 있다. 정말, 나는 차가운 밤속에 오롯이 앉아 그녀의 풍부하고도 나긋나긋한 음성을 듣고 있었다. 차가운 밤에.

여러가지 단편들 중에 단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면, "듀크" 그리고 "파를 썰다". 제임스 딘을 닮았다는 개를 그리워하다가 만나게 된 청년. 그와 함께 미술관에도 가고 뜬금없는 수영장을 간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오늘만이 아닌 지금까지 즐거웠다고. 그리고 옆선이 제임스 딘을 닮은 그는 떠난다. 듀크.
파를 썰다, 는 왜인지 쓸쓸한 내 마음과 닮아있다. 아니, 한 해가 끝나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과 닮아 있다. 파를 썰어서 된장국을 끓이고 황금버섯 무침에도 듬뿍 뿌리는 나. 이유없이 찾아오는 고독한 밤을 느끼면서도 혼자 있는 게 좋다는 그녀를 보면서 나를 느꼈다. 클렌징 젤로 꼼꼼하게 화장을 지우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리고 참방참방 물방울을 튀기면서 그렇게 얼굴을 씻고 또 씻었다. 한없이 씻었다. 그녀는 어쩌면 나와 같았다.

이렇게 차가운 밤, 침대에 몸을 살포시 기대고는 읽고 싶어지는 책.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너무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만으로 느껴졌다. 내 삶이 아닌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 유령의 이야기들만 늘어놓는 느낌이 들어서 오랜만에 만난 에쿠니 가오리답지 않았다. 언제나 남녀간의 사랑을 때로는 쿨하게 담아내던, 고독을 그것만으로 보지않고 살며시 내안에 들어온 행복으로 느끼게 해주는 에쿠니 가오리였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만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글.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속으로 '참, 좋다.'를 되뇌어볼 수 있는 글들. 그 느낌들이 그리웠다. 한없이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그저 한 방울 짜낸 눈물이 볼 위로 흐르는 느낌이 드는 그 글들이 좋았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렇다.

그저, 책을 내용이 아닌 느낌만으로도 나열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에쿠니 가오리의 모든 책이라기 보다는 단지 이 책이 그렇다. 물론, 다른 책도 그녀만의 문체를 느끼기에는 충분하지만 에쿠니 가오리를 진정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써놓은 유명한 책들을 뒤로하고 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건, 느낌 때문이다. 읽는 내내 아릿한 느낌의 연속이 된다. 그렇게 하나의 느낌을 만들어서, 책장을 덮을 때 즈음에는 좋다, 라는 말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글들. 그 모든 것들의 연속. 

아, 에쿠니 가오리가 그리웠다. 지나치게 이유없는 고독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요즘. 그녀의 책을, 글들을 느끼고 있으면 한없이 더 나락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소리. 바로, 그게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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