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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ㅣ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 난 후 당연하게도 나는 떠올렸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봐야겠다! 지금까지 읽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되는 듯 나는 아직까지 직접 접해보지 못한 아쉬움을 풀어내듯 이 <열하광인> 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친듯이.
"오히려 이 책은 혼돈을 일으키는 불꽃이다."
의금부의 최고 권위자인 그, 이명방이 <열하일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갈피를 못 잡았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각 페이지마다 몇 개씩 달려있는 주석(물론, 뜻을 정확히 알려주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다). 그리고 <열하일기>를 직접 접해보지 못한 내게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중력을 느껴보지 못한 내게 무중력에 대한 느낌을 소곤소곤 떠들어대는 느낌이랄까. 그런 무지상태에서 책읽기를 시작하니 혼란스럽기도 했으나 이명방의 저 한마디에 두 귀, 그리고 입 다물고 읽어 내려갔다.
국왕인 정조는 백탑파에게 최고의 믿음을 선사하지만 갑자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꼽으며 지금까지의 일을 뉘우친다는 뜻의 자송문을 바치라고 어명을 내린다. 또, 아끼는 이명방에게 백탑 서생을 감시하라는 어명도 함께. 간자 노릇을 하게 된 이명방은 배신을 한다는 느낌을 버리지 못한채 금서를 몰래 숨어서 읽던 열하광 모임에 가게 된다. 그때부터 일어나는 살인사건. 처음에는 억권 홍인태의 집 앞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고, 그 후에는 강가에서 역관 조명수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 후, 덕천 대사의 죽음.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가 죽어있었고 누명을 쓰게 된다. 또, 존경해 마지않는 이덕무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병환을 낫게 해준다는 청심환을 건네주었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이덕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그렇게 여럿을 죽인 살인마로 낙인을 찍히고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금상께 진상을 밝혀낼 때까지 하루를 달라며 시작되는 이명방의 범인찾기.
아, 읽는 내내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물론, 이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스테리한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일보다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있었다면 거짓말일까. 미스테리이기 이전에 이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 책에 대한 백탑파의 우러러봄. 문장들의 인용, 끝없는 믿음. 이명방은 예찬을 넘어서는 예찬을 한다. 도대체 그 책이 무엇이길래, 아니 책이란 것 그 자체가 무엇이길래. 끝없는 자문을 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 책을 통해서 세계를 넘나드는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여자주인공이 되어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도 있다. 책이란 그런 것이다. 나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지금의 나로 가만히 내려다 주는 마술을 부리는 계단 같은 것. 그들에게 <열하일기>란 것은 무엇인가. 정말 그 책은 무엇인가, 끝없이 물어보고 생각해보고 느껴보았다.
"사람들은 그 책을 인생이라고 했고 깨달음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그저 책이었다. 책보다 더 황홀한 이름은 없었다." (p.96-上)
"문장은 놀라운 변신 그 자체였다. 나무가 그냥 서 있을 때는 나무였지만, 강으로 첨벙 뛰어들자 배가 되었고 구르니 바퀴가 되었으며 타오르는 횃불이 되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변신의 극한을 보여주는 문장이야말로 참 문장이다. 이 책은 그런 문장들로 넘쳐 났고 나는 그 앞에서 내 문장을 잊었다." (p.159-上)
도대체 이렇게 한없이 극찬을 쏟아붓는 이 책에 대해 어찌 궁금증을 풀어놓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게 사건을 풀어내가는 과정중에 책에 대한, 책 자체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바빴다. 금서, 금할수록 더 읽고 싶어지는 책에 대한 매력. 책에 대한 매력 말고도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우정'이다. 어떠한 일에도 신의를 버리지 않고 자신의 벗을 이해해주고 배려하고 믿어주는 벗에 대한 생각. 그 모든 것이 이 책을 이끌어내는 근본이다. 딱 이 두가지라 말하고 싶다. <열하일기>와 벗에 대한 믿음.
하지만, 책 속의 책, 그 책 속의 또 책이 있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이 <열하광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말했다. 금서를 만들고 싶다고, 독자 중 누군가가 이 책이 금서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금서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삼십대를 다 쏟아부었다고. 그의 열정이 부러웠고 감탄하고 느껴보았다. 금서에 대한 매력, 백탑파에 대한 매력으로 그 세번째 이야기를 펼쳐낸 그가 야심차게 부러웠다. 이 한 권의 책을 위해서 쏟아부었을 그 열정과 노력의 결실 속에는 이야기의 매력을 뛰어 넘는 것이 들어있었다. 한 권을 읽음으로써 작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하겠다. 몇 달전 <바람의 화원>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맞먹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 들어차 있을까. 백탑파라는 소재, 그리고 그 시대의 이야기의 사실만을 적어내고 충분한데 그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내는 그들의 능력에 새삼 감탄해낸다.
금서를 향한 그의 열정, 어쩌면 그 꿈에 대한 여정의 반 이상은 채워진 것이 아닐까. 백탑파의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하고 어서 손에 잡고 싶어 안달인 <열하일기>를 찾아나설랜다. 손에 잡고 읽으면 나도 열하광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당연히 그들보다는 못할 것이다. 비슷은 할 수 있어도.
"여행의 참맛은 뜻밖의 순간과 마주칠 때 생긴다며, 휘고 돌고 꺾이고 좁아졌다 넓어지는 길에 그냥 몸을 맡기라고 했다. 이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어야만 할까, 무엇이 있지 않으면 어찌 될까 끌탕하지 말고, 어쨌든 있는 그 무엇인가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라고 했다. 이 세상엔 참 많은 길이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p.50-下)
그리고 나의 책에 대한 지침을 배운다. 지금부터 내가 읽는 책에 대한 지론은 이와 같아야 함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박지원, <원사(原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