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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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연습』은 보편적인 에세이 한 권 분량의 곱절에 해당하는 두께로 페이지마다 이야기가 빼곡하게 들어있다. 책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책의 머릿면을 보면 두 개의 검은 선을 볼 수 있는데 그 검은 선 앞뒤로 장이 구분된다. 첫 번째 장은 책의 반절에 해당하는 상당한 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남은 반절의 ¾은 두 번째 장, 그리고 나머지 가장 적은 부분이 가장 마지막 장이다. 언뜻 보기에도 전혀 고르지 않은 '장의 구분'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만 아마 당신도 나처럼, 읽는 내내 그 이유와 내용을 추측하긴 불가능에 가까울 것.

책에 대한 힌트만 조심스레 꺼내자면,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이 책 또한 누군가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개별적인 경험을 쌓아가고 때론 같은 사건을 마주한다. 그들의 기억 단편을 볼 수 있는 기회 따위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장담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그들은 모두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할 것이라는 것. 책에서 건진 문장을 덧붙이면 더욱 확신에 차 말할 수 있다.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거나/그렇게 인식하)기 때문. 에고이스트이며 나르시시스트인 우린 모두 서로를 모르고, 좋을 대로 기억하고, 그래서 추억하거나 버려둔다.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이라고 캐런의 심리 치료사는 말했다.







책은 또래보다 조숙하지만 아직 세상을 모르는 세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모든 걸 흐르는 대로 맡기다 그 뒤에 응당 따르는 대가와 책임을 마주하고, 당혹스러움과 슬픔으로 얼룩진 십 대. 학교라는 세계에서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학급 친구들로부터 주목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세라를 비롯한 다른 10대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저마다의 심리 세계 속에서 허우적댄다.


그러니까 앞으로, 더 나이 들면 마음의 아픔이 덜하다는 뜻이예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거 어느 시기도 마냥 쉬웠던 적은 없다. 아주 어릴 땐, 어른이라는 '상태'를 동경해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할 수 없는 것 또한 너무 많은 유년기에 어른이란 상태는 겉보기에 제법 근사하기 때문. 하지만 어리광을 피울 수도 거드름을 피울 수도 없는 어정쩡한 청소년기에도 역시 인생은 쉽지 않았고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었다. 본능적으로 어른의 '권력'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미 지나온 청소년기는 아무리 되짚어도, 그때 그 당시처럼 첨예하게 다가오지 못한다. 종종 회상에 젖은 대화를 할 때 문득문득 그 시절을 상당히 세심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그렇다. 하지만 세라를 통해 어른의 상태와 권력을 탐하던 십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누구도 완벽히 일치한 생을 살지 않기 때문에 세라와 나는 같이 붙여 놓아도 어쩔 수 없이 이질감이 드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지독한 고민과 버팀으로 살아가는 그때 그 상태는 어쩐지 동일하다.


생각은 가짜인 경우가 많거든. 감정은 언제나 현실이지. 진실은 아니지만 현실이야.


번역된 글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필요로 하고, 아무래도 반복적으로 읽었을 때 보다 매끄러운 이해가 가능하다. 그래서 책의 두께만큼이나 더 많은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간간이 저자가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집어넣은 부분들도 볼 수 있어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기억처럼, 이야기라는 그 매개체가 가진 성질이 그러하듯, 모두에게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 그저 사람과 기억, 그 두 가지에 집중해 읽었다. 이하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



사람in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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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Art & Classic 시리즈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유보라 그림, 박혜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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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당연하게 읽었지만 어쩐지 기억나지 않는 동화 『어린 왕자』. 예전에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는 참 어렵고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십대의 마지막 언저리였다. 약 1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어린 왕자』에는 익히 알던 어린 왕자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삽화가 담겨있는데, 그래서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미 너무 유명해져버린 원작을 두고 부담이 있었을 텐데도 그림 작가님이 이야기를 너무 따뜻하고 아름답게 잘 담아내셔서 보는 내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스밀 수 있었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

그리고 갑자기 그 앞에 나타나 양을 그려달라고 하는 아이,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자기 몸보다 조금 큰 별에 살고 있었다. 그의 별에는 그의 무릎 높이 정도의 활화산 두 개와 사화산 하나가 있고, 특별한 꽃 한 송이가 피어있다. 어린 왕자는 활화산 두 개와 사화산 하나, 그리고 특별한 꽃 한 송이를 두고 자기 별을 떠나, 여러 행성을 떠돈다. 다른 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쩐지 '어른'의 특징을 하나씩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백성으로 취하고 부리려는 왕, 허영심과 허세로 가득 찼지만 애정이 결핍된 사람, 주정뱅이, 모든 별을 소유하려 드는 사업가, 지리학자이지만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리학자 등…. 다른 별에서 만난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기도 하고, 씁쓸해지기도 한다.


어른들은 정말 중요한 건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들은 하지 않는다. "그 친구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제일 좋아해?" "나비를 수집하니?" 대신 이런 것만 묻는다. "친구가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야?" "몸무게는 어느 정도 되니?"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시니?" 이런 걸 알아야만 그 친구를 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아름다운 빨간 벽돌집을 봤어요. 창가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었는데……"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런 집을 상상해 내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10만 프랑 짜리 집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어른들은 "정말 대단한 집이겠구나!" 하고 감탄한다.


시인 듯 동화인 듯, 시 같은 동화 『어린 왕자』. 마치 가장 순수한 상태의 영혼이 적어낸 글처럼, 깨끗하고 따뜻하고 맑다. 어린 왕자가 만나는 각 행성의 어른들과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고, 동화는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진정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계속 생각하도록 이끈다.


마음과 관련이 있는 동화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에 어울릴 것 같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RHK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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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나는 대화와 어느 과거에 관하여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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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나는 대화와 어느 과거에 관하여』는 '지인'이긴 하지만 몹시 '타인'인 어느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총 네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집이다.


최근 읽은 소설들은 등장인물의 독백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이 느끼는 시각, 청각, 촉각 등 온갖 감각 묘사와 심리 묘사를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하지만 『어긋나는 대화와 어느 과거에 관하여』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대부분 인물 간의 대화. 단락 구분도 어쩐지 일반적이지 않다. 마치 드라마 대본을 읽는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가 그 결말을 예측하기 어려운 것도 그런 기분이 드는 데 한몫한다. 끝을 알 수 없었던 데는 조금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소설 속 주인공의 성질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른 인물들이 등장했기 때문.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부족한 부분이나 흠이 대개 인간적이거나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결여된 모습에 제각각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어쩐지 이 소설은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이해나 공감 따위는 별로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진위 파악이 불가능한 과거의 사건 앞에, 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인물 간 대화를 엿듣는 정도. 완곡하게 말할 줄 모르는 솔직한 인물 앞에 절절매는 주인공을 벙쪄서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내 과거가 완전히 다르게 기억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파격적인 단편 소설들을 통해 듣는 셈.


왜곡된 기억을 갖고 있는 건 누구일까


좋은 사람, 좋은 친구, 좋은 부모, 좋은 자식, 좋은 선생, 좋은 동료…. 모두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우린 누굴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의견을 지닌다. 물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 없는 법이지만. 소설은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개개인의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누군가에게 아주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게 기억되는 데 본인의 의도 같은 것은 전혀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자신도 몰랐던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약간의 의도가 서렸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항상 좋게만 기억될 수는 없겠지만 이토록 상극일 수 있을까. 정말이지 인간은 이렇게 다르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유치하구나 싶었다. 굳이 장르를 찾는다면, 심리 스릴러?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리액션을 토했던 책.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책인 것은 확실하다.


자칫 시대착오적 발상이 될 수 있는 언어들을 일부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시대착오적 이야기를 하는 인물과 그 이야기에 대처하는 인물, 그리고 작가와 나를 나눠두고 읽으면 오히려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짤막하게 나뉜 문단과 불쑥 불쑥 큰따옴표 처리가 된 대사들의 나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파격적인 전개. 따뜻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지만 소설 전반적인 시니컬한 분위기 속에서 독자는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고,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껏 제일 풍부한 리액션을 보일 만큼 말 그대로 재밌었던 책. 마지막으로 소오름 대사 하나.


너, 아직도 그 무렵의 인간관계에 머물러 있는 거니?


소미미디어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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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 컬러링북 우리가 사랑했던 순정만화 시리즈
여호경 지음 / 용감한까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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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너무 좋아하던 여호경 작가님의 만화책 『비타민』을 컬러링북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금껏 컬러링북에 색칠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건 무조건! : )








작가님의 사인도 있다. 옛날엔 꼭 저렇게, 작가들이 본인 캐릭터를 그리곤 했었는데.. 실물 캐릭터를 삼등신으로 그린 그림들도 너무 반갑다. 😭 컬러링은 완전 핑계고, 그 시절 좋아했던 그림을 잔뜩 가질 수 있어 그저 좋다. 후루룩 넘겨 보다 보면 마치 아이돌 화보집을 보는 느낌이랄까. 여호경 작가의 풀 컬러 작업은 책의 앞부분에 담겨있고, 뒤이어 컬러링 할 수 있는 라인 일러스트레이션이 나오는데 색칠하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도 꼭 예전에 보던 만화책 그 느낌 같아서, 예쁘다.





컬러링한 작업을 공개하진 않지만, 컬러링 하는 동안 색을 고르면서 나름 잡념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예쁜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색칠해보는 것)이 처음이라 흥미롭기도 하고, 재밌었다. 무엇보다 색칠하는 동안 여호경 작가가 그렸을 선 하나하나를 보면서 감탄했다. 선이 엄청 반듯하고 섬세했는데 그때도 디지털로 선 작업이 가능했을까? 어릴 때를 회상하다 보면 가끔 어디에서 멈춰야할지 모르게 과거로 간다. 그때도 컴퓨터는 있었고, 포토샵도 있었으니까. 아마 가능했겠지?


그 흔한 SNS 하나 찾을 수 없는 여호경 작가님의 근황도 문득 너무 궁금해진다. 오랜만에 추억 여행 : )




용감한까치에서 제공받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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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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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으로 어쩌지 못할 일 앞에 놓인 두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무기력하게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현 상황을 인정하고 손을 뻗는 인경과 그 손을 마다하지 않고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는 희진의 이야기. 도움을 구하는 것도, 도움을 주는 것도 쉽지 않은 현실의 차가운 공기를 조금 덥힐 수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목차는 사계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미 여름의 성질을 띠기 시작한 봄부터 더운 여름을 지나 추운 겨울까지 정말 일 년의 흐름이 흐르듯, 이야기는 천천하고 잔잔하다.




사소하든 사소하지 않든, 근거가 있든 없든, 타인을 비방할 목적 같은 것이 있든 없든, 소문이라는 것은 당사자를 괴롭게 할 수 있다. 희진은 자신에 대한 소문에 동조하지 않고,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한 인경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인경과 희진은, '인경의 비밀'을 계기로 더욱 친밀해진다. 완벽한 타인, 그것도 직장 내 동료가 이렇게까지 끈끈한 연대를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인경과 희진도, 그전에는 회사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인경이 처한 상황을 돕는 이는 희진이 유일해서, 잠깐 인경의 가족에 대한 배경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작가는 가족도 오랜 친구도 아닌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인경과 희진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인간애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나 친구를 향한 애정과 염려 말고, 완벽한 타인을 향한 인간애. 책 마지막에 남겨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는지 더욱 잘 알 것 같다.


지구가 한 번 공전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은 채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 그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희진이 인경에게 도움을 '주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어,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인경이 희진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이었다. 울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손을 뻗는 인경의 모습. '인경의 상황'이 아무리 극단의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완벽한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진이 해야 할 수고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할 수도 있고 혹시 거절하기 어려울 상대의 곤혹을 생각하면 도와달라고, 나 좀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렵지 않을까. 특별히, 곧바로 보답할 수 없을 때는 더더욱. 희진에 대한 인경의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 신뢰, 온정, 인간애와 같은 단어를 돌아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서평에서 밝히지 않은) 소설의 설정이 워낙 강렬해서 작가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어떻게 끝맺을지 궁금했다. 책의 마지막 언저리를 읽을 때까지도 그렇다 할 사건 사고가 없어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짓궂게도, 인경의 비밀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켰다면 어땠을까, 무성한 소문이 일고,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고 그로 인해 인경이 겪을 피해와 도움을 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인경과 희진, 두 사람이 '지키려 애쓴' 것이 정말로 잘 지켜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어떤 다른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래서 이듬해 봄, 그들이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하게 된다. 타인의 도움을 받는 일,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을 돕는 일. 두 가지 모두가 낯설기만 한 어른에게, 지금의 겨울을 보내는 우리에게, 잔잔하게 퍼지는 온기를 주는 소설. 두 인물의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


제가 갈 수 있는 길이면 희진 씨도 올 수 있어요. 봐요. 이렇게. 조금씩 밟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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