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왜? 여자는 왜?
와다 히데키 지음, 이유영 옮김 / 예문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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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처럼 남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 서술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식 사회상과 일본식 사회상(저자가 일본인)을 비교해가면서 현대에 등장하는 여러 정신병리학적인 문제들의 원인을 짚어보는 책이다. 흥미로운건 인간을 심리학적으로 우울증Melancholy형 인간과 정신분열Schizophernia형 인간으로 분류하고, 현대사회엔 과거와 달리 정신분열형 인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대두한다고 말하고 있다.

 

ㅇ 우울증형 인간은 마음의 주역이 '자신'이다. 이것을 병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조울증 환자는 모든 사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 '병에 걸린게 아닌가' '내가 타인에게 심한 행동을 한 건 아닌가' '나는 장래에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식이다.

 

ㅇ 정신분열증형 인간은 마음의 주인이 '타인'이요, '주위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내 험담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식이다.

 

ㅇ 우울증형 인간이 생각하는 기준은 자신이다. 그러므로 성공을 거머쥐려고 한다면 스스로 노력하고 타인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타인과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하다.

 

ㅇ 정신분열증형 인간은 생각하는 기준이 타인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타인의 눈을 항상 의식한다. 그래서 타인과 같은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기 쉽다.

 

책에선 정신분열증형 인간이 증가하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집단적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이 하는대로 하는 것이 더 안심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밀리언 달러 대박이 더 터지기 쉽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음반이나 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집단에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내 스스로 호오를 찾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ㅇ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비온 Wilfred R.Bion의 이론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정신과 군의관이었던 비온은 전쟁 스트레스 등으로 심정 이상을 일으킨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그룹치료를 이용했다. 거기서 비온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는데 그룹에 명확한 과제를 주고 일을 시키면 그룹 전체가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잘 기능하지만, 아무런 과제도 주지 않으면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해 무리는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된다고 한다.
하나는 한 명의 리어를 만들어 모두가 그에게 의존하는 의존 그룹이고, 또 하나는 한 명의 가상의 적을 그룹 안이나 밖에 만들어 모두가 힘을 합쳐 싸우려 하든지 아니면 도망치려고 하는 방향으로 정리되는 투쟁, 토피 그룹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룹 안에 사이가 좋은 커플을 만듦으로써 축하 분위기가 조성되거나 밝은 미래에 대한 좋은 기분으로 정리되는 커플 그룹이다.

 

이 이론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 카리스카적인 정치지도자의 등장...이었으면 좋겠지만 정치의 위상은 땅밑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므로 신흥종교의 부흥으로 볼 수 있겠다.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만큼 명백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리고 두번째는 왕따현상. 세번째는 연예인의 결혼이나 가정생활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볼 수 있겠다.

 

근데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일까. 왕따 문제는 일본에서도 전통있는(...) 문제이고, 종교문제는 비포 크리스트 시대부터 성행했던 문제며, 연예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일본인들의 특성이 아니었던가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기질적으로 일본에는 정신분열형증 인간이 많았기 때문에 과거부터 그래왔다, 라고 말하면 별 할말은 없지만 현대에 '왜 이렇게 나약한 남성이 많아졌는가' '여성들은 어째서 결혼을 하지 않는가' '방정리를 못하는 여성이 생겨났다' 라는 명제들을 다루면서 그런 전통적인 문제를 끄집어내면...

 

이 비온씨의 이론은 영국인이라는 것만 제하면 매우 빈약한 이론으로 보인다. 원래 빈약하거나, 아니면 책에 소개하기 위해 너무 줄였거나, 혹은 번역의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를 다소 잃어버렸거나. 어떤 쪽이든 이 책에 있어서 적합하지 않은 예인 것 같다.

 

o 우울증세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도 고통스럽지만 특히 우려되는 문제가 '자동사고'라는 증세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상사로부터 "회의실로 잠깐 와주겠나. 면담한 일이 있네"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보통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지방근무나 전근 발령이 떨어졌나?"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대기발령?" 등등 그 내용을 멋대로 추측해버리는 것이다. 이 때는 긍정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자동사고(!) 누구나 컨디션이 난조일때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하는 거지만 심리학적으로 우울증형, 정신분열증형으로 딱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적당히 두 가지 성향을 혼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많이 표출되는가의 차이로 구별되는 것이지, 다른 분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우울증형 인간이지만 책을 읽고 있자면 정신분열증형 인간의 특성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뜨끔하고.

 

정신병리학서라기엔 조금 가벼운 느낌이 있는 책이다. 가벼운 만큼 쉽게 읽히긴 하지만...그렇구나. 딱 '이달의 운세'같은 느낌의 책이었다. '흐음, 흐음 그렇구나. 근데 조금 안 맞는 곳도 있는 것 같네, 그렇지만 참고는 해두지 뭐'랄까. 서양의 카운셀링이 동양의 점과 비견되는 것을 볼 때, '흐음, 흐음 그렇구나'라고 동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카운셀링의 본질에 걸맞는 책인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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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김별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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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아이의 탄생에서부터 성숙할 때까지 여성으로서 가지는 성에 초점을 맞춘 소설로 파격적인 제목으로 유명세를 누렸던 책이기도 하다. 상당부분 솔직하고, 작가 개인의 경험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들여다볼 수 없을것만 같은 내면까지 묘사함으로서 작가 자신의 체험담이 아닌가 의심케 하기까지 한다.


실은 제목이 너무 파격적이고 유명세를 톡톡히 누린 책이라 오히려 손이 안 갔었는데, 후속작인 '가족'을 읽고 그 솔직함과 거칠 것 없이 꿰뚫어 보는 시선에 반해서 이 책도 보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에세이집은 가족이 더 마음에 들지만, 이 책도 굉장히 매력적인 책이다.

 

o 소녀가 당한 강간은 세상과의 첫경험, 말하자면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강간을 섹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남자들이 지금도 오해하듯이.

o 인도영화 <밴디트 퀸>을 만든 여성감독은 '성적자극을 전혀주지 않고 강간과 윤간의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반장이었던 주인공이 강간을 당한 친구의 병문안을 가면서 상상했던 강간의 이미지가, 그 친구의 멍들고 부풀어올라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을 보고서 깨지는 장면에서 나왔던 문구들이다.

 

실은 나도 강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폭력이라고 하면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거기에 성이 덧붙여지면, 어딘지 질척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생기게 된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에게 맞았다면 '큰일났네, 어디 부러진 곳은 없어?'가 되지만 길을 가던 여자가 불량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면 안됐다는 생각은 하지만, 어디 신체 일부분이 크게 다쳤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안 든다. 이를테면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폭행이다. 성폭력에 있어 반항하는 여자를 조용히 만들기 위해 안면이나 약한 복부에 구타를 하는 것은 드물지도 않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 상처를 떠올리지 못하고, 야릇한 상상을 하게 되는걸까. 그것도 같은 여자이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이면성에 대해 멋지게 폭로하고 있는 부분이다.

 

o 나의 건조함과 불감증은 이성이 욕망에게 승리했다는 유일한 징표였다.

 

억압받은 성으로 자라난 여성은 성에 대해 말하는 것도, 즐기는 것도 금기시되어온 면이 있다. 그 결과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도 성에 대해 굳게 쌓인 벽을 허물지 못하는 것이다.

 

o 일각수 이야기는 처녀 숭배와 순결 지상주의의 혐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설화일 뿐이다. 훗날 정직만을 미덕으로 삼는 고지식한 학자들은 끝내 일각수의 정체를 밝혀 환상을 박살내기를 서슴치 않았다. 고대 전도사들이 대륙을 오가며 선도를 하다가 문득 스치며 보았다는 일각수의 원형이 실제로는 아프리카의 코뿔소라는 것이다.

 

일각수의 기원을 이 책에서 처음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순결의 상징이자, 처녀의 무릎에만 머리를 베고 잠이 든다는 성스러운 일각수가 튼튼하다 못해 거대한 코뿔소였다니! 순결에 대한 사회적 강요와 역사적 전통을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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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마야 스토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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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실 우리는 일생 동안 남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해왔어. 우리는 고독한 늑대만 보면 금방 사랑에 빠져버리지. 고독한 늑대가 방랑자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를 유혹하고,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그가 방랑생활을 접도록 만들어버려.
하지만 정작 그가 정착을 결심하고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우리 집에서 밤을 지새고 나면 금방 싫증이 나지. 그가 곁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어지는 거야. 사나운 늑대를 애완용 강아지로 만들어놓고 나면 그 강아지가 귀찮고 부담스러워지는 거야. 그래서 남자를 다시 쫓아내버리지."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中에서
 
 

표지도 이쁘장하고 얇은 책이라 가볍게 집었다가 폐부를 쑤셔대는 통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남의 얘기면 그럴 수도 있지라면서 웃고 넘기겠는데, 내 문제를 직시하고 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읽었다.

 

뭐라 정리를 해보고 싶어, 며칠 째 잡고 끄적거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쓰지를 못하겠다. 스스로 뭐라 말하지도 못하면서 한없이 추천만 하고 싶은 책이다. 연애를 시작하고,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여자들 혹은 도대체 저 여자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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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2 - 7년 후 다시 만난 쉴라와 헤이든, 그리고...
토리 헤이든 지음, 이수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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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치료를 주제분야로 하시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사람들의 상처를 더 민감하게 알아본다고.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더 잘 도와줄 수 있다고.
 
정말 그런걸까. 나는 상처 입은 사람을 알아보긴 하지만, 아는 척 하진 않는다.그들의 인생까지 끌어안고 싶지 않다.
 
사람의 상처란건 쉽게 아물지 않는다. 완치라는 것은 없다. 평생동안 끌어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뿐. 나는 누군가의 인생을 짊어질 각오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더욱 빠져들었는지 모른다. '한 아이'란 이야기에.한 사람의 교사가 한 아이의 인생을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시켰는지.
그 기적에 나도 기대고 싶었다. 한 때의 만남으로도 인간은 누구나 달라질 수 있는 강한 존재라 믿고 싶었다.너무나도 극적인 기적에 들떴었다. 희망에 가득차서 그저, 기뻤다. 분노에 가득찬 아이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밝고 아름다운 아이로 변모하는 그 기적에.
 
그러나 '한 아이'의 후속편인 '한 아이 2'에 드러난 진실은 그 희망을 그대로 묻어버렸다.한 때의 꿈이 끝나고 다시 방치된 아이가 어떻게 비참하게 커가는지. 어떻게 다시 그 구렁텅이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자신을 사랑스러운 아이로 만들었던 선생님을 얼마나 원망하는지. 그들이 다시 빛나는 희망을 움켜지기 위해 얼마나 돌아가야 했고, 서로가 얼마나 상처받아야 했는지...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가벼움이란 없다.한 사람 한 사람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고, 우리의 인생도 무겁다.
 
나로서는,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주위를 둘러 볼 수도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걸까.
 
그건 앞으로 배우고, 느껴야 할 것이다.
한아이 1을 읽고 느꼈던 그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한아이 2를 읽고 느꼈던 좌절감과 거짓환상을 보게 했다는 분노들을 모두 끌어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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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이훈구 지음 / 이야기(자음과모음)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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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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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론과 그리고  휴즈맨들은 어릴 때 보았던 텔레비전 폭력의 양이 수년 심지어는 수십 년 후까지 그 사람들의 공격 수준에 영향을 줌을 밝혔다. 이 연구에서 피험자가 시청한 폭력의 양은 피험자들이 보았다고 보고한 프로그램과 이 프로그램들의 폭력점수(폭력장면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가를 점수로 매긴)로 정의했다. 피험자들의 공격 수준은 학급 동료들이나 그들의 선생들이 매긴 행동점수로부터 얻었다. 이 두 가지 변인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본 결과, 정말로 상관이 있었다. 즉 어릴 때 매체 폭력을 많이 본 사람들일수록 어른이 되었을 때 공격 수준이 더 높았다. 게다가 이 관계의 강도는 나이가 들수록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매체 폭력의 영향이 시간이 갈수록 축적됨을 시사한다.
 
(중략)
 
폭력매체를 지속적으로 시청하는 것은 폭력과 그것에 따른 결과에 대한 정서적 민감도를 떨어뜨린다. 간단히 말해서, 수많은 살인과 싸움, 공격을 보게 되면 시청자들은 이러한 시청각 자료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고 정서적 반응을 더 적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생활에서의 공격도 보다 덜 해로운 것으로 보고 심지어, 피해자들이 상당한 아픔과 고통을 표시해도 그 피해자들을 덜 동정한다. 특히 이러한 효과는 성폭력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본문에서
 
폭력성을 낮다고 해도,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폭력성이 높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폭력성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알며,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폭력매체를 접했는가"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1.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라는 환경결정론 적인 입장은 문제가 있다.
 
같은 환경에 주어진다하더라도 사람은 모두 다른 행동을 한다.
그 이유를 그들은 다른 성장환경에서 찾는다. 만약 같은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면 그 역시도 같이 행동했을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변화하는 환경적 요인 속에서 자극에 따라 이리저리 변화할 뿐인가.
 
문제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폭력을 행사한 사람의 잘못이 마치 사회의 문제인양 두리뭉실 넘겨서는 안 된다.
폭력은 폭력을 행사한 자의 잘못이다. 폭력으로밖에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이 바로 잘못이다.
 
치장하지 마라.
그대의 나약함을 사회로 떠넘기지 마라.
 
그리고, 그 나약함에 동조해 범죄자를 상처입은 영혼으로 받들지 마라.
 
 
 
2.
 
범죄자에 대한 어설픈 연민보다 더 두려운 것은,
범죄자를 연민하는 것에서 비롯한 범죄 자체에 대한 둔감함이다.
 
더더욱 자극적이고, 절절한 사연이 없이는 그저 일상에 묻어나는 약간의 위협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자연재해를 인정하듯, 교통사고를 인정하고, 그렇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인정해 버린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피해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피해자를 사회적인 본보기로 만들어 '언제 내가 그렇게 될 지 모르므로' 강해져야 한다고 우리를 채찍질한다.
 
또한 타인의 어려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도와주다간 나도 피해자가 될지도 몰라.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피해자가 잘못한 거야'의 사고까지 이어지게 되면, 우리 사회는 이미 도덕이 아닌 힘의 논리에 의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에 관한 토론을 볼 때 이런 말을 본 적이 없는가?
'여자가 그런 옷을 입고 다니니까 그런 일을 당하지'
'그 시간에 왜 그런 곳을 돌아다녔대?'
 
약하기 때문인가.
약한 자는 강자에 의해 짓밟히면서 그저 속으로 눈물이나 삼키며 살아야 하는가.
 
그대는, 그대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속으로 눈물만 삼키고 싶은가.
 
(얼마전에 한 여성의 자살 사건에서 어째서 피임을 하지 않았느냐의 논조로 글을 쓴 적이 있기 때문에 저 글이 더욱 와 닿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성폭력이란 범죄 자체에 대해 상당수준 용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살인' 혹은 그 비슷한 범죄들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저변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갖가지 요소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 의한 학대, 가슴이 찡한 구구절절한 사연, 희망이 안 보이는 삶...
그 요소들에 정신을 뺏겨,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 연민이 가져오는 것은 범죄에 대한 용인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안이한 마음.
 
그 마음이 당신 자신을 집어 삼킨다 해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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