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이훈구 지음 / 이야기(자음과모음)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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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론과 그리고  휴즈맨들은 어릴 때 보았던 텔레비전 폭력의 양이 수년 심지어는 수십 년 후까지 그 사람들의 공격 수준에 영향을 줌을 밝혔다. 이 연구에서 피험자가 시청한 폭력의 양은 피험자들이 보았다고 보고한 프로그램과 이 프로그램들의 폭력점수(폭력장면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가를 점수로 매긴)로 정의했다. 피험자들의 공격 수준은 학급 동료들이나 그들의 선생들이 매긴 행동점수로부터 얻었다. 이 두 가지 변인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본 결과, 정말로 상관이 있었다. 즉 어릴 때 매체 폭력을 많이 본 사람들일수록 어른이 되었을 때 공격 수준이 더 높았다. 게다가 이 관계의 강도는 나이가 들수록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매체 폭력의 영향이 시간이 갈수록 축적됨을 시사한다.
 
(중략)
 
폭력매체를 지속적으로 시청하는 것은 폭력과 그것에 따른 결과에 대한 정서적 민감도를 떨어뜨린다. 간단히 말해서, 수많은 살인과 싸움, 공격을 보게 되면 시청자들은 이러한 시청각 자료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고 정서적 반응을 더 적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생활에서의 공격도 보다 덜 해로운 것으로 보고 심지어, 피해자들이 상당한 아픔과 고통을 표시해도 그 피해자들을 덜 동정한다. 특히 이러한 효과는 성폭력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본문에서
 
폭력성을 낮다고 해도,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폭력성이 높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폭력성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알며,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폭력매체를 접했는가"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1.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라는 환경결정론 적인 입장은 문제가 있다.
 
같은 환경에 주어진다하더라도 사람은 모두 다른 행동을 한다.
그 이유를 그들은 다른 성장환경에서 찾는다. 만약 같은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면 그 역시도 같이 행동했을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변화하는 환경적 요인 속에서 자극에 따라 이리저리 변화할 뿐인가.
 
문제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폭력을 행사한 사람의 잘못이 마치 사회의 문제인양 두리뭉실 넘겨서는 안 된다.
폭력은 폭력을 행사한 자의 잘못이다. 폭력으로밖에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이 바로 잘못이다.
 
치장하지 마라.
그대의 나약함을 사회로 떠넘기지 마라.
 
그리고, 그 나약함에 동조해 범죄자를 상처입은 영혼으로 받들지 마라.
 
 
 
2.
 
범죄자에 대한 어설픈 연민보다 더 두려운 것은,
범죄자를 연민하는 것에서 비롯한 범죄 자체에 대한 둔감함이다.
 
더더욱 자극적이고, 절절한 사연이 없이는 그저 일상에 묻어나는 약간의 위협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자연재해를 인정하듯, 교통사고를 인정하고, 그렇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인정해 버린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피해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피해자를 사회적인 본보기로 만들어 '언제 내가 그렇게 될 지 모르므로' 강해져야 한다고 우리를 채찍질한다.
 
또한 타인의 어려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도와주다간 나도 피해자가 될지도 몰라.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피해자가 잘못한 거야'의 사고까지 이어지게 되면, 우리 사회는 이미 도덕이 아닌 힘의 논리에 의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에 관한 토론을 볼 때 이런 말을 본 적이 없는가?
'여자가 그런 옷을 입고 다니니까 그런 일을 당하지'
'그 시간에 왜 그런 곳을 돌아다녔대?'
 
약하기 때문인가.
약한 자는 강자에 의해 짓밟히면서 그저 속으로 눈물이나 삼키며 살아야 하는가.
 
그대는, 그대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속으로 눈물만 삼키고 싶은가.
 
(얼마전에 한 여성의 자살 사건에서 어째서 피임을 하지 않았느냐의 논조로 글을 쓴 적이 있기 때문에 저 글이 더욱 와 닿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성폭력이란 범죄 자체에 대해 상당수준 용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살인' 혹은 그 비슷한 범죄들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저변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갖가지 요소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 의한 학대, 가슴이 찡한 구구절절한 사연, 희망이 안 보이는 삶...
그 요소들에 정신을 뺏겨,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 연민이 가져오는 것은 범죄에 대한 용인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안이한 마음.
 
그 마음이 당신 자신을 집어 삼킨다 해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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