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여, 안녕
김종광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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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개짜리 소설. 읽으면서 내가 죽고나도 이 소설은 계속 남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교과서에 실리고 한국의 문단 중에 꼽히게 될 사람은 동시대에 봐도 그 특출함이 확연히 보이는구나, 싶기도 하고.

문장이 걸출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쉬이 읽히는 문장도 아니고 -읽다가 조금쯤은 지루함에 몸을 틀게 되고- 하지만 글이 너무도 진솔하다. 소설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일상적이고, 꾸미지 않아서 이것이 소설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세세한 곳까지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다 묘사하면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는 구성력이 있는 작가다.

그의 문학적 배경에 “김유정의 반어, 채만식의 풍자, 이문구의 능청스런 입담이 함께 심어져 있”(김만수, 문학평론가)음을 한껏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혹자는 신인-신인도 아니지만- 작가에게 너무 과한 평이 아닌가 말하지만, 몇십년 후에는 그의 이름을 단 칭찬이 다른 후배작가들에게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내가 리얼리즘 사조의 글만 보면 광분하는걸지도.

현실적인 글을 쓰는 작가는 많이 봤다. 하지만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왜곡되기 마련이다. 1984로 유명한 조지 오웰이 젊었을 때 쓴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생활'마저도 노숙자들을 자기의 사상에 따라 너무 미화했다는 비평을 받았다. (그의 소설에서 노숙자들은 자신들이 노숙자임에도 노숙자를 위한 지원을 비판한다. 노숙자에서 벗어나 직업을 가지게 하는 것이 노숙자 재활시설의 소임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노숙자로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는 것이다)

김종광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없다. 아니, 주인공이 너무 많다. 모두가 같은 비중으로 묘사되며 어느 쪽에 치우치는 일없이 -그래서 때로는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비평을 받으며- 현실을 재구축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이 시대를 그는 글이란 수단으로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현실의 재현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이 책에 11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정육점'을 읽으면 다들 고개를 갸웃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매춘을 하는 매음굴의 풍경인데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바꿔 넣음으로서 본의아니게 선정적이고 여성비하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매춘이란 소재를 좀 더 현실적으로 끌어낸 것이다. 단순히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 수치가 느껴질 정도의 쇼를 하고 팔려다니는 그네들 인생이 남자로 묘사됨으로서 오히려 제대로 보인다는 것은 또 무슨 아이러니일까.

앞으로 어떤 작품을 낼지,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가 참으로 기대되는 작가이자 그만큼 작가의 활동을 보고 있기가 힘든 작가이기도 하다. (김동인이나 기타 소설가들이 어떻게 길을 걸어갔는지를 안다면 참 지켜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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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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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난해한 젊은 작가들의 꼬리에 해설이 붙듯 이 책에도 해설이 붙어 있다.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라는 제목으로. 삶과 죽음이 모호하게 묘사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잔혹함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참 잘 지은 제목같다.

 

일본현대문학을 접하면서 그 가벼움과 비윤리성에 현기증을 느낀 때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며 '야하다'는 느낌보다 구토감을 느끼던 그런 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닳고 닳아 어지간한 묘사엔 꿈쩍 안한다 싶었던 내가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밤새도록 뒤에서 쫓아오는 누군가를 피해 끝도 없이 달리고, 달리는 그런 느낌이다. 이 소설은. 악몽은 있는데 끝은 없고, 가장 최악의 상상으로 치달아 그 악몽은 더없이 찜찜하게 한 편의 막을 내린다.

 

그러나 단순히 혐오감과 구토감을 느끼게 할 뿐이라면, 그냥 젊은 작가들의 실험사조로 치부하고 읽고 덮어버리면 될텐데, 이 책엔 문장을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매력이 담겨 있다. 카프카적인 상상력으로 엉망진창으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그것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보인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고 적의로만 감싸진 세계. 마치 악몽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놀리며 허우적대는 듯한 그런 기시감 속에서 눈을 돌릴 수도 없게 한다. 오히려 그런 상황 속에서 상상력은 극대화 되어 작가가 던지는 잔혹한 이미지들에 입을 틀어막고 싶어진다.

 

소설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미학'이 아닌 그 어떤 말로 이 소설을 정당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카프카가 그러했고, 콘크리트 가든이 그러했듯이 비윤리적이고 충격 외엔 아무것도 던지지 않는 이런 소설을 어째서 출판되어 사회로 나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른 어떤 이유를 들 수 있겠는가. 극으로 완전히 치달으면 - 제대로 미쳐버려서, 오히려 현실을 덮어버리면 - 그것은 외려 매력적이 된다. 반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에 미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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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영수증 - Receipt Please 스물다섯살
정신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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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영수증이 아닌 정신 and 영수증. 뭔가를 샀다는 증명으로 따라온 종이는 내게는 귀찮은 물건일 뿐인데, 영수증을 모아 일기를 쓴 사람도 있다. 그리고 책도 나왔다. 새로운 유형의 시집같기도 하고, 읽고 있으면 소소한 웃음이 지어지는 책.

이상하게 원피스를 샀다는 영수증 아래에 있는 이 글이 자꾸만 기억이 난다.


아무도 나를 예뻐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옷을 한 벌 샀다.


이 두 줄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끌어안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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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나에겐 죄가 되어 죽습니다
박삼중 / 태일출판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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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목은 '100인의 사형수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다. 미국과 기타 외국에서 사형수가 반드시 목사와 면담하듯이, 사형수들을 마지막을 지켜본 스님이 써낸 책이다. 감동이나 교훈이 있을것같은 느낌이지만 한 사람에 한장 반씩 그저 사실이 덤덤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형, 사형, 사형, 사형이 끝도없이 이어지는 짧은 단편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의 '죽음'이란 정말 큰 죄이자, 씻을 수 없는 죄라는 생각을 했다.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이유로는 정치적인 이유와 간첩으로 잡혀온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살인이다. 계획적이든 우발적이든 한 번 내려진 사형판결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다 죽어가는 사형수를 보고 있자면 보는 사람 마음이 더 먹먹해진단다. 세상 마지막에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는가 싶어서. 실제로도 우발적인 살인, 혹은 자신이 하지 않은 살인의 현장에 있는 피의자들은 자포자기가 되어서 죄를 그냥 뒤짚어 쓰는 경우가 많단다. 더 살아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그저 죽고 싶어서.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무리 통탄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껏 급박한 상황이면 살인도 불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예로 으슥한 골목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몇 가지 없다. 달린다고 해도 강도보다 느리고, 치고 박는다 해도 내 손에 얼마나 힘이 실리겠는가. 범죄를 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선 그저 푼돈이 필요했을 뿐이라 해도 피해자인 내 입장에선 그런 사소한 위협도 생명을 걸고 저항해야 한다. 솔직히 당하는 입장에서 돈주면 물러날 상대인지, 아니면 연쇄살인마인지 구별할 게 뭔가. 어지간하게 때려서 기절시키기를 기대하거나, 몇 걸음 못가 잡힐것을 알면서도 도망가는 선택대신 나는 손에 칼을 쥐고 있다면 칼로 찌르고, 병을 들고 있다면 깨진 병으로 찌르고, 부탄가스를 가지고 있다면 상대에게 불을 붙여 버릴거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살인은 끝까지 피해야만 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윤리적인 입장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에선 그러한 방어적인 살인 역시 범죄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살인은 마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급박한 상황에서 살인을 불사한다는 것은, 남을 죽이고서도 나는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기징역이 되거나, 사형수가 되어버리면 나도 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살인은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되는 죄라고 생각하는 그 뒤엔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한 법이 아닌가. 법의 목적이 범죄의 처벌이 아니라 그 예방에 있고,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면 이러한 법을 받으니 하지마시오라는 공표가 아닌가. 그래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대가 때려죽여도 마땅한 놈이라 해도 그를 죽이게 되면 살인이다. 사람의 행동엔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그 이유에 대한 선처는 없다. 사회의 윤리를 지키기 위한 법이 이제는 시스템화 되어, 사람으로서의 판단은 흐릿해지고 구문은 더 견고해져간다.

 

사형수들이 마지막 삶의 끝에서 하는 말들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해도 될 정도의 미문들 뿐이라, 외려 더 착잡하다. 우리나라에서 사형수들에겐 자신이 죽을 날을 알려주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하루하루를 지나,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끌려온 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사랑을 외치고,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다. 참혹한 범죄자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그들의 죄를 더 무겁게 한다. 그 죄는 저 순박한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도 무마할 수 없을만큼 그러한 큰 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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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여자는 왜?
와다 히데키 지음, 이유영 옮김 / 예문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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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남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 서술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식 사회상과 일본식 사회상(저자가 일본인)을 비교해가면서 현대에 등장하는 여러 정신병리학적인 문제들의 원인을 짚어보는 책이다. 흥미로운건 인간을 심리학적으로 우울증Melancholy형 인간과 정신분열Schizophernia형 인간으로 분류하고, 현대사회엔 과거와 달리 정신분열형 인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대두한다고 말하고 있다.

 

ㅇ 우울증형 인간은 마음의 주역이 '자신'이다. 이것을 병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조울증 환자는 모든 사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 '병에 걸린게 아닌가' '내가 타인에게 심한 행동을 한 건 아닌가' '나는 장래에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식이다.

 

ㅇ 정신분열증형 인간은 마음의 주인이 '타인'이요, '주위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내 험담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식이다.

 

ㅇ 우울증형 인간이 생각하는 기준은 자신이다. 그러므로 성공을 거머쥐려고 한다면 스스로 노력하고 타인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타인과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하다.

 

ㅇ 정신분열증형 인간은 생각하는 기준이 타인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타인의 눈을 항상 의식한다. 그래서 타인과 같은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기 쉽다.

 

책에선 정신분열증형 인간이 증가하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집단적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이 하는대로 하는 것이 더 안심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밀리언 달러 대박이 더 터지기 쉽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음반이나 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집단에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내 스스로 호오를 찾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ㅇ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비온 Wilfred R.Bion의 이론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정신과 군의관이었던 비온은 전쟁 스트레스 등으로 심정 이상을 일으킨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그룹치료를 이용했다. 거기서 비온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는데 그룹에 명확한 과제를 주고 일을 시키면 그룹 전체가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잘 기능하지만, 아무런 과제도 주지 않으면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해 무리는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된다고 한다.
하나는 한 명의 리어를 만들어 모두가 그에게 의존하는 의존 그룹이고, 또 하나는 한 명의 가상의 적을 그룹 안이나 밖에 만들어 모두가 힘을 합쳐 싸우려 하든지 아니면 도망치려고 하는 방향으로 정리되는 투쟁, 토피 그룹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룹 안에 사이가 좋은 커플을 만듦으로써 축하 분위기가 조성되거나 밝은 미래에 대한 좋은 기분으로 정리되는 커플 그룹이다.

 

이 이론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 카리스카적인 정치지도자의 등장...이었으면 좋겠지만 정치의 위상은 땅밑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므로 신흥종교의 부흥으로 볼 수 있겠다.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만큼 명백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리고 두번째는 왕따현상. 세번째는 연예인의 결혼이나 가정생활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볼 수 있겠다.

 

근데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일까. 왕따 문제는 일본에서도 전통있는(...) 문제이고, 종교문제는 비포 크리스트 시대부터 성행했던 문제며, 연예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일본인들의 특성이 아니었던가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기질적으로 일본에는 정신분열형증 인간이 많았기 때문에 과거부터 그래왔다, 라고 말하면 별 할말은 없지만 현대에 '왜 이렇게 나약한 남성이 많아졌는가' '여성들은 어째서 결혼을 하지 않는가' '방정리를 못하는 여성이 생겨났다' 라는 명제들을 다루면서 그런 전통적인 문제를 끄집어내면...

 

이 비온씨의 이론은 영국인이라는 것만 제하면 매우 빈약한 이론으로 보인다. 원래 빈약하거나, 아니면 책에 소개하기 위해 너무 줄였거나, 혹은 번역의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를 다소 잃어버렸거나. 어떤 쪽이든 이 책에 있어서 적합하지 않은 예인 것 같다.

 

o 우울증세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도 고통스럽지만 특히 우려되는 문제가 '자동사고'라는 증세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상사로부터 "회의실로 잠깐 와주겠나. 면담한 일이 있네"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보통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지방근무나 전근 발령이 떨어졌나?"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대기발령?" 등등 그 내용을 멋대로 추측해버리는 것이다. 이 때는 긍정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자동사고(!) 누구나 컨디션이 난조일때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하는 거지만 심리학적으로 우울증형, 정신분열증형으로 딱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적당히 두 가지 성향을 혼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많이 표출되는가의 차이로 구별되는 것이지, 다른 분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우울증형 인간이지만 책을 읽고 있자면 정신분열증형 인간의 특성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뜨끔하고.

 

정신병리학서라기엔 조금 가벼운 느낌이 있는 책이다. 가벼운 만큼 쉽게 읽히긴 하지만...그렇구나. 딱 '이달의 운세'같은 느낌의 책이었다. '흐음, 흐음 그렇구나. 근데 조금 안 맞는 곳도 있는 것 같네, 그렇지만 참고는 해두지 뭐'랄까. 서양의 카운셀링이 동양의 점과 비견되는 것을 볼 때, '흐음, 흐음 그렇구나'라고 동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카운셀링의 본질에 걸맞는 책인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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