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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난해한 젊은 작가들의 꼬리에 해설이 붙듯 이 책에도 해설이 붙어 있다.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라는 제목으로. 삶과 죽음이 모호하게 묘사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잔혹함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참 잘 지은 제목같다.
일본현대문학을 접하면서 그 가벼움과 비윤리성에 현기증을 느낀 때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며 '야하다'는 느낌보다 구토감을 느끼던 그런 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닳고 닳아 어지간한 묘사엔 꿈쩍 안한다 싶었던 내가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밤새도록 뒤에서 쫓아오는 누군가를 피해 끝도 없이 달리고, 달리는 그런 느낌이다. 이 소설은. 악몽은 있는데 끝은 없고, 가장 최악의 상상으로 치달아 그 악몽은 더없이 찜찜하게 한 편의 막을 내린다.
그러나 단순히 혐오감과 구토감을 느끼게 할 뿐이라면, 그냥 젊은 작가들의 실험사조로 치부하고 읽고 덮어버리면 될텐데, 이 책엔 문장을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매력이 담겨 있다. 카프카적인 상상력으로 엉망진창으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그것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보인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고 적의로만 감싸진 세계. 마치 악몽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놀리며 허우적대는 듯한 그런 기시감 속에서 눈을 돌릴 수도 없게 한다. 오히려 그런 상황 속에서 상상력은 극대화 되어 작가가 던지는 잔혹한 이미지들에 입을 틀어막고 싶어진다.
소설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미학'이 아닌 그 어떤 말로 이 소설을 정당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카프카가 그러했고, 콘크리트 가든이 그러했듯이 비윤리적이고 충격 외엔 아무것도 던지지 않는 이런 소설을 어째서 출판되어 사회로 나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른 어떤 이유를 들 수 있겠는가. 극으로 완전히 치달으면 - 제대로 미쳐버려서, 오히려 현실을 덮어버리면 - 그것은 외려 매력적이 된다. 반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에 미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