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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나에겐 죄가 되어 죽습니다
박삼중 / 태일출판사 / 1991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의 부제목은 '100인의 사형수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다. 미국과 기타 외국에서 사형수가 반드시 목사와 면담하듯이, 사형수들을 마지막을 지켜본 스님이 써낸 책이다. 감동이나 교훈이 있을것같은 느낌이지만 한 사람에 한장 반씩 그저 사실이 덤덤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형, 사형, 사형, 사형이 끝도없이 이어지는 짧은 단편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의 '죽음'이란 정말 큰 죄이자, 씻을 수 없는 죄라는 생각을 했다.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이유로는 정치적인 이유와 간첩으로 잡혀온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살인이다. 계획적이든 우발적이든 한 번 내려진 사형판결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다 죽어가는 사형수를 보고 있자면 보는 사람 마음이 더 먹먹해진단다. 세상 마지막에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는가 싶어서. 실제로도 우발적인 살인, 혹은 자신이 하지 않은 살인의 현장에 있는 피의자들은 자포자기가 되어서 죄를 그냥 뒤짚어 쓰는 경우가 많단다. 더 살아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그저 죽고 싶어서.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무리 통탄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껏 급박한 상황이면 살인도 불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예로 으슥한 골목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몇 가지 없다. 달린다고 해도 강도보다 느리고, 치고 박는다 해도 내 손에 얼마나 힘이 실리겠는가. 범죄를 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선 그저 푼돈이 필요했을 뿐이라 해도 피해자인 내 입장에선 그런 사소한 위협도 생명을 걸고 저항해야 한다. 솔직히 당하는 입장에서 돈주면 물러날 상대인지, 아니면 연쇄살인마인지 구별할 게 뭔가. 어지간하게 때려서 기절시키기를 기대하거나, 몇 걸음 못가 잡힐것을 알면서도 도망가는 선택대신 나는 손에 칼을 쥐고 있다면 칼로 찌르고, 병을 들고 있다면 깨진 병으로 찌르고, 부탄가스를 가지고 있다면 상대에게 불을 붙여 버릴거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살인은 끝까지 피해야만 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윤리적인 입장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에선 그러한 방어적인 살인 역시 범죄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살인은 마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급박한 상황에서 살인을 불사한다는 것은, 남을 죽이고서도 나는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기징역이 되거나, 사형수가 되어버리면 나도 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살인은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되는 죄라고 생각하는 그 뒤엔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한 법이 아닌가. 법의 목적이 범죄의 처벌이 아니라 그 예방에 있고,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면 이러한 법을 받으니 하지마시오라는 공표가 아닌가. 그래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대가 때려죽여도 마땅한 놈이라 해도 그를 죽이게 되면 살인이다. 사람의 행동엔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그 이유에 대한 선처는 없다. 사회의 윤리를 지키기 위한 법이 이제는 시스템화 되어, 사람으로서의 판단은 흐릿해지고 구문은 더 견고해져간다.
사형수들이 마지막 삶의 끝에서 하는 말들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해도 될 정도의 미문들 뿐이라, 외려 더 착잡하다. 우리나라에서 사형수들에겐 자신이 죽을 날을 알려주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하루하루를 지나,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끌려온 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사랑을 외치고,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다. 참혹한 범죄자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그들의 죄를 더 무겁게 한다. 그 죄는 저 순박한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도 무마할 수 없을만큼 그러한 큰 죄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