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는 것


 

요즘 나는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제 어른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묻곤 한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에서 정육점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과 할머니가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자신이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는가를 말하면서, 자신들의 성격 같은 것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다. 어쨌든 부모인간으로, 그러니까 부모라는 딱지를 붙여서 늘 의지할 대상으로 아니면 투정 부릴 대상으로 생각하던 단계를 지나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기꺼이 함께 나누겠다는, 일종의 친구 같은 관계로 재설정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건 꽤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모와 직접 대화를 하지 않는 한, 부모의 삶을 이해하게 하도록 돕는 것들은 생각 외로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부모, 특히 아버지상은 어떤 판타지를 구현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그려지는 가장의 전형적인 모습은 헌신적인 하지만 쓸쓸한 아버지이거나 강한 아버지인 것 같다. 영화 <테이큰>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강한아버지다. <7번방의 선물>에서는 자식 밖에 모르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헌신적인 아버지가 등장한다. 또 주말 드라마에서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들이 쓸쓸하게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매체들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전형적인 판타지를 구현해내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부모’, 특히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 가진 진실들에 다가가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부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의 관점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두고 겪을 수 있는 어떤 연습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영화이다. 영화는 아이가 뒤바뀐다는 설정에서 시작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서사의 진행 자체이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연습을 거쳐서 얻게 되는 이름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원래 아버지였겠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깨달음을 거쳐야만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아버지가 되기 위해 거치는 연습과 시행착오를 담백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크게 두 유형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주인공 료타는 성공한 건축가이자 직장인으로서 도쿄의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자식을 위해 좋은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다이는 전기상회를 운영하면서 자식들과 함께 목욕도 하고 캠핑도 가고 잘 놀아주면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버지다. 이 두 아버지가 대립된 것처럼 계속 그려지지만, 사실 이 둘은 우리가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요구하는 일종의 역할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뛰어난 능력과 사회적 성공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최선의 환경과 교육을 제공할 것이 요구되고 동시에 함께 목욕하고 캠핑도 가고 연을 날려주면서 아이들과 재밌게 놀아주는 살가운 역할도 요구된다. 하지만 이 둘 중 어느 것 하나 쉬운 역할은 아니다. 둘 중 하나를 소홀히 한다면, 무능한 혹은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로 취급 받기 쉽다. 영화에서 대립적인 두 아버지상은 실제로 한 명의 아버지에게 요구되는 역할이고 영화에서 료타가 겪게되는 갈등과 노력(류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하는)아버지가 되는 연습들의 일부인 셈이다.


물론 아버지가 되는 연습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위에서 말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에 부여될 가장 순수한 역할, 즉 자식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연습 과정이다. 료타가 케이타와 류세이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젓가락질이 서투른 아이를, 피아노에 서투른 아이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연습을 하는 것이 이 과정의 핵심이다. 이 과정은 아버지가 행하는 일방적인 과정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눈으로 자식의 입장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 같은 것들을 보면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식의 입장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나 고민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말 그대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소통이나 이해 같은 것들이 형성하려고 할 때, 다시 말해 아버지가 자식의 눈으로 자신과 가족을 바라보게 되며, 이것을 늘 하나의 세계로 인정하고 자신의 세계와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연습을 할 때,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보통 자식을 낳는 순간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겠지만,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수많은 연습과 이해 그리고 갈등의 반복된 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아버지도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도 자식을 보면서 배우고,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나가고 또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을 고쳐가고 사과하며 자신을 깎고 덧붙이며 아버지그렇게 되어갈뿐이다. ‘되어간다는 점에서 모든 아버지들은 진행형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진행형으로서 아버지들은 가족이라는 보다 좁은 울타리 내에서 소통이나 이해를 연습하며 성숙의 과정 중에 있는 존중 받을만한 노력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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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그녀 가연 컬처클래식 16
이상민 지음, 신동익 외 각본.각색 / 가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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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명암(明暗)

<수상한 그녀>에 대한 단상

 

상상, 몽상, 꿈 등으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쾌감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기쁨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상상이나 꿈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존재해왔던 이유들도 어쩌면 옛 사람들도 그 기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전적인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기쁨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 혹은 한시적인 쾌감이라는 점을 동시에 그렸다는 점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구운몽>이나 <조신설화>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상상력, 몽상 그리고 꿈 등은 모두 인간의 욕망과 관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종류의 욕망들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의 성취 같은 것들 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꿈이나 상상 속에서는 이루어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같은 매체들은 보편적으로 원하고 있는 바를 그려내어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며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대개 재밌었다라고 평가하곤 한다.

<수상한 그녀> 역시 보편적인 욕망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주인공인 오말순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반기문 총장 다음으로 훌륭한 반현철 교수를 키워냈다. 똑부러지는 자식교육과 집안 살림은 그녀의 자부심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늙은이의 고집으로 느껴진다. 그 고집의 일부가 며느리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고 며느리는 결국 병을 앓아 눕게 된다. 집안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가족들은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 논의하게 되고 요양원으로 가기 전날 마지막 외식을 하게 된다. 외식을 마치고 쓸쓸히 손자를 만나러 가던 중에, 오말순은 청춘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는데, 그러던 중 그녀는 20살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말순이 오두리가 되는 그 단순한 상상력은 다시 한 번 젊음을,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그녀의 노래 <한번 더>에서 잘 보여진다.

 

또 다시 밝아올 내일의 아침처럼 빛나는 희망이 널 비출거야/ 가슴속에 숨어있던 이제는 빛바랜 어릴적 꿈들을/찾아서 향해서 꿈이 아닌 현실로 화려한 조명이 널 비출거야[…]오 한번 더 그래 한번 더!” (<수상한 그녀> ost, <한번 더> )

 

오말순은 다시 한 번 젊어져,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다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그 욕망은 말순이라는 자식을 위해 남에게 못할 짓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그리고 그 억척 같은 인생의 교훈으로 자신의 아집을 만들어 타인들을 평가했던 팍팍한 인생이 아니라 오드리 햇번처럼 빛나는 두리로서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늙어간다는 것,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우리는 연습하지 못한다. 죽음과 늙음은 어느 순간 삶에 불쑥 끼어드는 불청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세월이 안겨주는 서러움과 불가항력의 힘에 좌절감을 느낀다. 서러움과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젊어지고 싶다는,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고 <수상한 그녀>가 시작되는 그 유쾌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유쾌한상상력이 언제나 기쁨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고전적인 작품들이 꿈과 상상의 명과 암을 동시에 그리듯, 우리가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망의 이면에는 도피라고 부를만한 우리의 비겁함이나 게으름도 담겨 있다. 오두리가 아닌 오말순으로서 빛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장벽이 오말순으로부터 오두리를 상상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게으르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연습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비겁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시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게으름이나 비겁함을 굳이 부각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오말순의 행복이 오두리를 통해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말순은 오말순이고 오두리는 오말순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다만, 게으름과 비겁함이 말해지려면, 그것은 오말순으로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말순이 계속 오두리를 꿈꿀 때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상상력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에서 얻어진 에너지로 우리에게 쉽게 생길 수 있는 게으름과 비겁함을 미리 경계해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현명함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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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들은 많지만 이제 슬슬 돌아오는 학기 준비도 해야하고 개인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들도 꽤 많기 때문에 편하게 읽을 책들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 달만 해도 <시적 정의>와 <깃털>은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적과 흑>만을 두고 끙끙 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2월에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보고 정리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기에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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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세계 지성 16인과의 대화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신현욱 옮김 / 창비 / 2014년 1월
25,000원 → 23,750원(5%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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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형식- 20세기의 변증법적 문학이론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여홍상 외 옮김 / 창비 / 2014년 1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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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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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을 읽고 정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읽기를 마친 것은 2주 전쯤이었는데, <적과 흑>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1830년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몇 권 관련도서들을 찾아보았고 그 리스트를 모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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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서정복 지음 / 살림 / 2007년 7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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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콜린 존스 지음, 방문숙 외 옮김 / 시공사 / 2001년 4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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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위대한 프랑스를 향한 열정
서정복 지음 / 살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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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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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의 열정에 관하여 :: 열정과 타인

<적과 흑>[1]에 관한 생각

 


 

진정한 열정이란 열정 그 자체만을 생각하는 법이다.

파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열정들이 가소로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열정을 드러내는 데 골몰하기 때문에,

옆 사람을 늘 착각에 빠뜨리고 만다.”[2]

 

열정에 자신을 바치는 건 좋다.

그렇지만 열정도 없으면서 열정에 자신을 바치다니!

, 슬픈 19세기여! – 지로데.”[3]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악은 옳지 못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열심히 살아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부모들은 의사가 되어라, 판사가 되어라 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세련된 인간들의 요구는 무엇을 하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해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세기 전 니체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lieber will noch der Mensch das Nichts wollen, als nicht wollen).”[4] 한 세기 전에도 우리의 열정이나 의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자 하는 문제는 꽤 심각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의욕하는 것, 즉 자신이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보편적인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이 무엇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대상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의 열정, 나의 의욕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탕달은 『적과 흑』을 통해 열정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열정에 관한 몇 가지 유형들을 보여주는 인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주로 열정과 타인에 관계에 관한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 열정의 근저에 타인이 있다는 것, 나의 열정은 곧 타인의 열정 혹은 타인을 위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스탕달 1830년대 연대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적과 흑>은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래도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는 쥘리앵 소렐, 레날 부인 그리고 마틸드 간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그 중 열정과 타인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마틸드일 것이다.

 

마틸드는 라 몰 후작의 딸이다. 브장송 신학교 교장의 천거로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된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라 몰 후작의 딸인 마틸드를 유혹한다. 마틸드는 당대의 가장 상류층만 모이는 살롱과 라 몰 후작의 집안을 한 손에 휘어잡고 흔들 수 있는”(424)사람이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빼어난 외모, 자신에게 구애하는 지체 높은 귀족 자제들, 아버지의 권력과 막대한 부, 뛰어난 지성, 마틸드는 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살롱의 대화들에서 늘 권태를 느끼고 하층민 출신의 명민한 청년 쥘리앵 소렐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녀는 개성 없이 밋밋한 성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멋진 청년들에게 느끼는 유일한 불만이기도 했다. 그 청년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나 유행을 좇지 않는 것을 은근히 비웃곤 했는데, 그들이 그럴수록 그녀의 눈에는 평범하고 시시한 위인들로 비쳤다.”(451) 하지만 쥘리앵은 다르다. 마틸드가 보기에 쥘리앵은 혼자 행동하기만을 좋아하고”, “특별한 재능이 있으며, 그래서 남들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의사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남들을 경멸하기에마틸드는 쥘리앵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틸드는 자신의 열정을 바칠 대상으로 쥘리앵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쥘리앵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권태롭지 않았다. 위대한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자신이 대견해서 매일 스스로를 축복했다. 이 기쁨에는 많은 위험이 뒤따를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럴수록 좋지 뭐! 훨씬 더 좋고말고!”(436)

 

그녀에게 열정이란 반복적이고 평균화된 일상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선조인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추도하기 위해 상복을 입었을 때, 그것은 평균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주변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 표시이자 자신은 영웅의 시대를 희구하며 영웅적인 삶을 살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시였다. 그래서 마틸드가 쥘리앵에게 표현하는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사랑은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서 영웅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싶은 보다 근원적인 열정의 변형태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쥘리앵과 나 사이에서라면 결혼 계약서도 필요 없고, 부르주아식의 의례를 위한 공증인도 필요 없어. 우리 둘 사이에서라면 모든 게 영웅적인 것이 돼. 모든 것이 정해진 틀을 떨치고서 이루어지는 거야. 쥘리앵이 귀족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이것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사랑과 같은 모습이지. 당시의 가장 탁월한 남자였던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사랑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다름없단 말이야. 쥘리앵을 사랑하는 게 내 잘못이겠어? 궁정 귀족 청년들이란 하나같이 <진부한 예법>만 추종하는 데다, 상궤를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험이라면 그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사람들인걸.”(430)

 

마틸드가 쥘리앵에 대한 상념에 젖을 때면, 그녀는 일상적인 안락함의 감옥에 안주하는 귀족 자제들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런 모습이 얼마나 영웅적인 것인지를 생각한다. 마틸드에게 쥘리앵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열정을 쏟을 대상이다. 영웅적인 방식으로 이 안온한 상류사회에 파문을 일으킬 자기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사랑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쥘리앵이라는 하층민 출신의 비범한 청년은 파문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대상이다. 마틸드가 보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라 몰 후작의 딸이 목수의 아들에게 헌신한다 라는 사랑 이야기야 말로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한 영웅적인 모습인 것이다.

마틸드에게 자신을 완전히 쥘리앵에게 바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대한 완전한 파괴이다. 자신이 목수 아들에게 헌실할수록 그 영웅적인 면모는 더욱 빛을 발한다.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다는 만족감”(579)이 마틸드에게 느껴질 때, 그것은 이미 사랑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에 대한 완전한 소유나 그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이라는 사랑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만족감’, 즉 내가 하층민을 사랑하고 있고 그런 자기 자신이 상류 사회의 일상적인 관례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음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틸드의 사랑, 아니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영웅적인 모습으로 일상의 관례들을 파괴하고 싶다는 영웅적인 면모에 대한 맹목적 열정은 귀족적이기 보다는 노예적인 것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노예란 수동적인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치 기준에 대한 반동을 통해 가치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좋음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노예에게는 늘 타인이 필요하다. 마틸드의 열정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주인의 열정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열정, 타인에 의한 열정, 타인들에 비친 자기 자신을 위한 노예적 열정이다. 이런 마틸드의 열정은 쥘리앵이 감옥에 갇히자 더욱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마틸드는 자랑스러운 어떤 감정에 도취해 있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자존심마저 압도할 정도였다. 그녀는 삶의 매 순간을 평범치 않은 어떤 행동으로 채우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쥘리앵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긴 대화 내용은 극히 별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계획들로 채워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쥘리앵)는 영웅주의에 지쳐있었다[…] 반면에 마틸드의 오만한 영혼은 자신을 지켜볼 군중과 자신에게 찬탄해 줄 <타인들>을 필요로 했다.”(642)

 

마틸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일탈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일 때, 이를 찬탄해 줄 타인들이었다. 그녀가 영웅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싶어했던 것, 상류층의 살롱에서 권태를 느낀 것은 그들의 그녀에 대한 예찬은 이미 식상한 것이었거나 입에 발린 관례적인 것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경탄이나 찬탄의 대상으로서 자신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열정은 <타인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경외의 대상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열정은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봐 줄 타인들이 없다면 그녀의 열정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틸드의 열정은 불행한 것이라고, 또 마틸드는 불행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그녀의 열정에는 늘 <타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그녀만의 고유한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타인들>에게 찬탄받을 자기 자신에 도취되거나 그런 상념에 젖어 어떤 일/대상에 열정적인 수많은 마틸드들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열정은 불행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런 열정은 치료되어야 할 이기 보다는 이해되어야 할 문제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1] 스탕달, 『적과 흑』, 임미경 옮김, 열린책들, 2009. (이하 본문에 페이지수만 표기하거나 각주에 페이지 수만 표기)

[2] pp. 319-320

[3] p. 570.

[4] F.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KSA5, 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Hg.),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2007, p. 412.;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6, p.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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