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는
것
요즘 나는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제 어른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묻곤 한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에서 정육점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과 할머니가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자신이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는가를 말하면서, 자신들의 성격 같은 것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다. 어쨌든 ‘부모’를 ‘인간’으로, 그러니까 ‘부모’라는 딱지를 붙여서 늘 의지할 대상으로 아니면 투정 부릴 대상으로
생각하던 단계를 지나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기꺼이 함께 나누겠다는, 일종의 친구 같은 관계로 재설정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건 꽤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모’와 직접
대화를 하지 않는 한, 부모의 삶을 이해하게 하도록 돕는 것들은 생각 외로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부모’상, 특히 아버지상은 어떤 판타지를 구현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그려지는 가장의 전형적인 모습은 ‘헌신적인
하지만 쓸쓸한 아버지’이거나 ‘강한 아버지’인 것 같다. 영화 <테이큰>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강한’ 아버지다. <7번방의 선물>에서는
자식 밖에 모르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헌신적인 아버지가 등장한다. 또 주말 드라마에서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들이 쓸쓸하게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매체들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전형적인 판타지를 구현해내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부모’, 특히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 가진 진실들에 다가가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부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의 관점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두고 겪을 수 있는 어떤 연습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영화이다. 영화는 아이가 뒤바뀐다는 설정에서 시작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서사의 진행 자체이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연습을 거쳐서 얻게 되는 이름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원래 아버지였겠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깨달음을 거쳐야만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거치는 연습과 시행착오를 담백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크게 두 유형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주인공 료타는 성공한 건축가이자 직장인으로서 도쿄의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자식을 위해 좋은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다이는 전기상회를 운영하면서 자식들과 함께 목욕도 하고 캠핑도
가고 잘 놀아주면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버지다. 이 두 아버지가 대립된 것처럼 계속 그려지지만, 사실 이 둘은 우리가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요구하는 일종의 역할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뛰어난 능력과 사회적 성공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최선의 환경과 교육을 제공할 것이 요구되고 동시에 함께
목욕하고 캠핑도 가고 연을 날려주면서 아이들과 재밌게 놀아주는 살가운 역할도 요구된다. 하지만 이 둘
중 어느 것 하나 쉬운 역할은 아니다. 둘 중 하나를 소홀히 한다면,
무능한 혹은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로 취급 받기 쉽다. 영화에서 대립적인 두 아버지상은
실제로 한 명의 아버지에게 요구되는 역할이고 영화에서 료타가 겪게되는 갈등과 노력(류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하는)이 ‘아버지’가
되는 연습들의 일부인 셈이다.

물론 ‘아버지’가 되는 연습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위에서 말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에 부여될 가장 순수한 역할, 즉
자식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연습 과정이다. 료타가 케이타와 류세이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젓가락질이 서투른 아이를, 피아노에
서투른 아이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연습을 하는 것이 이 과정의 핵심이다. 이 과정은 아버지가 행하는
일방적인 과정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눈으로 – 자식의
입장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 같은 것들을 보면서 –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식의 입장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나 고민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말
그대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소통이나 이해 같은 것들이 형성하려고 할 때, 다시 말해 아버지가 자식의
눈으로 자신과 가족을 바라보게 되며, 이것을 늘 하나의 세계로 인정하고 자신의 세계와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연습을 할 때,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보통 자식을 낳는
순간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겠지만,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수많은 연습과 이해 그리고 갈등의 반복된 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아버지도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도 자식을 보면서 배우고,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나가고 또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을 고쳐가고 사과하며 자신을 깎고 덧붙이며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갈’ 뿐이다. ‘되어간다’는
점에서 모든 아버지들은 진행형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진행형으로서 아버지들은 가족이라는 보다 좁은 울타리
내에서 소통이나 이해를 연습하며 성숙의 과정 중에 있는 존중 받을만한 노력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