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시의 힘>(詩の力)은 ‘디아스포라 사상가’ 서경식(1951~)의 첫 문학에세이집이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식의 주제로 책을 출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이 땅의 지식계와 독서계에 신선한 충격과 서늘한 감동을 선사한 바 있다.”(p.279) 현재 東京經濟大學에서 “‘인권과 마이너리티’라는 과목명으로 재일 외국인의 인권을 둘러싼 여러 문제와 나치 독일에 의한 유태인 등 마이너리티 박해에 관해 강의하”(p.90)고 칼럼이나 강연 등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꾸준히 피력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등이 있다.
강렬한 일러스트와 제목에서 짐작하듯 이 책이 다루는 철학적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래도 강연 원고를 가필 또는 집필한 것이고, 시가 다수 수록되어있어 읽기 수월하다. 이 책은 ‘2015년 작가들이 사랑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들은 추락한 작금의 문학적 권위를 회복시키는데 <시의 힘>이 일조했다고 평가했다. 남은 삶을 ‘글’과 함께 할 독자라면 필독을 권한다.
저자는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일본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날카롭게 분석한 일본 지식인들의 ‘자국민 대상 세뇌 프로젝트’를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견지를 뚜렷이 하고 싶은 독자라면 관심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특히 서경식의 글을 평소 애정하는 독자라면 수장 욕구를 자극할 소식이 있다. “저자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자비출판한 개인 소장판 시집 <8월>에 수록된 열한 편의 시 전문을 번역하여 수록했다는 점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볼 충분한 매력과 가치가 있다.”(p.280 권성우 문학평론가)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저자는 서문에 “근래에 강연한 내용 등을 기반으로 집필한 에세이 가운데, 넓은 의미에서 ‘문학’과 관련된 것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 대부분 (...)강연 원고를 가필했다. 다만 3장 (...) 1, 2부 두 편만은 (...)강연을 토대로 집필한 것이며, <시의 힘>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직접적으로 이 두 편에 기대었다.”(p.4)라고 밝혀두고 있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루쉰을 사랑했다. 그래서 루쉰의 글을 제대로 해석한 나카노 시게하루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카노는 루쉰의 글에서 절망밖에 읽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p.110)라고 느낀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며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p.110)인 것이라 정의했다.
특히, ‘환등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흥미롭다. “일본의 근대화를 지고 나아갈 지식인 예비군들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국인 학생의 존재에도 개의치 않고, 참수 장면에 박수갈채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아시아 근대사 출발점에 있어서의 엄청난 시각차가 존재한다.”(p.102)며 그의 범세계적 소신을 함께 밝혔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관점을 견지한다. 국가, 민족,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존재를 자각하고 인간다움을 발휘하는 보편적 인간애를 위한 관점 말이다.
일본제국주의와 독재 정권의 공통점은 바로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학대했으며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 힘든 시기 민중의 아픔을 대변했던 시인,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 김수영, 김지하 등 그들의 시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 공포와 설움, 혼돈의 세월 속에 ‘시의 힘’을 깨달을 수 있었던 저자는 그래서 더욱 김지하의 변심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리라.
저자의 범세계적 행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발휘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한국의 정주하 사진작가가 원전 사고 피해지를 촬영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고 그는 함께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 타이틀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였고, 이것은 조선의 시인 이상화 ‘시’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당한 이들은 피난을 갔든 현지에 남았든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명백한 사실은 그들의 ‘토지’가 국가와 자본에 오랫동안 빼앗겼다는 것이다. (...) 바로 그 ‘빼앗겼다’라는 고통으로부터 다시 한 번 출발하여 ‘빼앗은’ 자들, 즉 국가나 자본과 싸워야만 한다. 이 사실을 중심에 두면 오키나와, 후쿠시마, 조선이라는 삼자는 서로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정주하, 한홍구, 그리고 나, 세 사람의 일치된 생각이다.”(p.127~128)
저자는 빼앗긴 것을 ‘조선의 국토’(민족)에 두지 않고 고통 자체에 두었다. 그리고 ‘고통’을 제공한 책임자를 ‘공격 대상’으로 설정하고 ‘피해자’(마이너리티)끼리의 연대를 제안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연대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본 것이다. 생각의 전환, 열린 사고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세상 따라 시의 소재도 달라진다. 시인의 존재 이유를 정희성의 <시를 찾아나서며>에서 밝히고 있다.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p.153)이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p.155)며 시인들에게도 각성을 촉구한다.
또 저자는 각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디아스포라를 평등한 구성원으로 맞이하는 열린 공동체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뿐만 아니라 “비유럽권에서 일어난 ‘외적타자’에 대한 제노사이드, 특히 아프리카나 남북아메리카 선주민을 표적으로 삼았던 제노사이드에 관한 문학작품의 수는 많지 않다.”며 여기서도 특별히 시인들의 역할을 당부했다.(p.215)
프리모 래비의 주장은 독자들을 한층 더 심오한 철학적 경지로 이끈다. 래비는 유태인들에게 당시 나치로부터 피신할 충분한 시간과 정보가 있었음에도 ‘어째서 사전에 도망가지 않는가?’라고 묻고 ‘편리한 진실’, 무의식중에 믿어버린 ‘허위’나 ‘환상’ 등의 심리 상태의 심각성을 함께 분석해 내놓았다. 또 우리는 핵무기의 위협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할까?’라며 주의를 환기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공포는 당시의 공포보다 과연 더 근거 없는 것일까?”(p.229)라고.
서평에 다 적지 못한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세계시민으로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는 독자라면 말이다. 저자는 디아스포라의 외로운 삶의 ‘恨’을 ‘더불어 함께 사는 데’에서 찾은 이 시대 진정한 휴머니스트다. <시의 힘>에는 그런 그의 진심이 잘 표현되었다. 다만 이 책에서 그의 문학작품만을 기대했던 독자라든지 제목만을 보고 책을 고른 독자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 내용에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있고, 그 전체에 ‘시의 힘’이 관통하고 있다는 것에는 모두 공감할 것이다. 하여 개인적 바램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에세이와 시로만 채워진 책이 출판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p.153)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p.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