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정미경(1960년~2017년)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랑, 욕망, 탐욕과 집착, 연민, 자기애, 허무, 후회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죄다 서로 어긋나있고, 욕망에 가려져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그들의 욕망은 결국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론은 좀 의외였다. 뉘우침의 기회를 잡으려는 자에게는 죽음을, 한결같이 비겁한 자에게는 승리를 안겨주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권선징악의 교훈에 있지 않고 현실의 반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이 그러하듯 소설 속의 역사도 현재진행형으로 둔 것이다.

 

소설의 시작은 질주이다. 설국열차가 브레이크 없이 무한 궤도를 질주하듯 중호는 자신의 애마, 부의 상징인 재규어를 몰고 한 밤중의 속도감을 즐기고 있다. 속도계가 180을 넘어간다. 아! 그 순간 누군가 따라붙었고 살해 위협을 느낀다. 이 남자 중호는 “리니엔쿠라는 사람이 말했어요. 나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정말 심금을 울리는 말이쟎아요?”(p.183)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돈의 화신인 인물이다. 당연히 피도 눈물도 없으며,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각종 편법을 동원하여 부자들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개인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대단한 실력자이긴 하다. 주위에서는 그를 동물적인 육감을 지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철저한 분석에 의해 나온 계산의 결과물들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살아온 세월만큼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당췌 변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다만, 중호는 삶의 가치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기회,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주어졌다. 윤 신부와 그가 돌보는 아이들, 지원과 몇 차례 만남을 거듭하면서 찾아온 변화였다. 조금의 시간이 그에게 더 허락되었더라면 아마도 중호는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삶의 과정을 즐기는 삶이 되지 못하는 한, 삶은 늘 외롭고 허무하고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또 한 명의 남자, 한석은 자기애에 빠진 이중인격자이다. “머리로는 혁명을, 입술엔 와인을, 가슴속엔 천박한 권력욕의 풍선을 품고 있”(p.235)는 “고쉬 캐비아”(p.235)(프랑스 용어)이다. 겉으론 민주투쟁의 아이콘인양 행동하지만 내면은 더럽고 치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간. 비겁하고 탐욕으로 가득찬 무책임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원과 사랑하면서 어린 윤희를 임신시켰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이 일도 없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연민한다. 투쟁하던 시절, 뜻을 함께 하던 후배를 자살로 내몰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반대했음에도 기어이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윤희.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었던 어린 시절, 야학 선생님이 집 다락방에 피신 중이었다. 그 남자를 사랑했을까? 죽도록 사랑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반신불수 아버지가 버젓이 두 눈 뜨고 누워있는데도 매일 미친 듯이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것 아니겠는가. 그 선생님, 한석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만을 탐한다. 현재는 배우이자 고급 콜컬이다. 또 한 남자 중호, 한석이 그녀의 몸만을 탐하는 인물이라면 중호는 그녀의 시간만을 탐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두 남자 모두 또 다른 여자, 지원을 사랑한다. 그림으로 세상, 자연과 인간을 표현하는 유지원, “내 작품에 매달린 이런 저런 꼬리표들을 전부 떼어내고 순수하게 작품 자체로 승부하”(p.144)고픈 그녀, 새침하면서 부탁도 거절도 못하는 게 천성이다. 하지만 유독 한 남자에게만은 부탁도 거절도 자유롭다.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가 동주다. 그 남자에게는 지원이 해바라기 자체이고 그는 그녀의 키다리아저씨다. 하지만 그녀에게 동주는 만만한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알았지만, 글쎄.. “야학은 처음엔, 앨리스가 우연히 가게 된 이상한 나라와도 같았다. 좁은 구멍을 다시 돌아 나오면 잊혀져버릴 낯선 공간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는 호기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땐 토끼의 귀를 잡아당기면 다시 그 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멍의 안과 밖,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코드가 동주였다. 동주는 아무 때나 잡아당기면 될 것 같은 토끼의 귀였다.”(p.62)

 

또 한 사람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 윤 신부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영웅이라 불릴 만한 딱 한 사람이다. 영웅이라 불리기에도 사실 옹색한 것이 사실 그조차도 주인공들의 삶에는 그렇게 관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올곶은 삶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전부이니 작은 영웅이라고 해두면 좋을 듯 하다. 사실 그도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에 소문내서 같이 하자.(...) 천사의 집의 천사는 아이들이 아니라 신부님이라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귀여운 천사가 아니라 주름이 지고 아랫배는 나오고 애들을 위해서라면 은근슬쩍 편법도 마다 않는 사기꾼 천사. 동네 과수댁의 연정을 사업에 이용하는 제비 천사. 기부금 독촉 전화하면서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뻔뻔 천사.”(p.61)일 뿐이다.

 

소설에는 절대 캔디도, 절대 백마 탄 왕자도, 절대 얄미운 이라이자도 없다. 말하자면 피해자가 곧 가해자이고, 가해자가 곧 피해자인 것이다. 하물며 중재자도 없다. 보통은 이 존재가 주요 사건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우연히, 혹은 캐물어서 어렵게 알게 되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전달해주는 사이다 역할을 해야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존재가 애초에 없었다. 사실 그 역할을 윤 신부가 해 주리라 기대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의 요지일지라도 대상자 역시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가버린다. 사실 이런 것이 더 현실과 부합하는 장치라고 본다. 요란스러운 신파도, 글을 꾸미려는 미사여구도 없다. 그리고 감정고조를 시킬 일도, 감정에 호소해야하는 부분도 없다. 그저 묵묵히 그려내는 디테일한 현실적인 묘사만으로 사건들을 설명하고 그것으로 가슴이 쫀쫀해지는 긴장감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이런 것이 과연 정미경 작가의 필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람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싣고 목초지 위로 달아난다. 악을 쓰는 윤희를 뻔히 바라보던 한석이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윤희는 왼손에 쥐고 있던 베레타를 들어올려 조준경에 눈을 갖다댄다. 눈물 속에 그의 뒷모습이 몇 겹으로 흔들린다. 손등으로 눈을 쓱 닦고 다시 구멍을 들여다본다. 수그린 목덜미 아래 완강한 어깨, 차진 모래가루가 아직 반짝이며 들러붙어 있을 등줄기, 손바닥이 기억하는 그의 엉덩이의 굴곡, 그 아래 강인한 두 다리. 억세게 내 허리를 감싸던 푸른 나무 같은 다리. 손가락을 당기는 순간 누군가 낚아채 듯 어깨가 뒤로 밀리고 꼭 그 힘만큼 누가 민 듯 그가 휘청하며 주저앉는다. 윤희의 귀에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억누른 비명만이 귀를 찢는다. 풍경이 아득해진다. 손바닥이 차갑게 미끈거린다. 바람과 햇살 아래 그의 모습이 꿈속의 풍경인 듯 희게 바랜다.”(p.283~284)

 

책 무게는 2005년 1쇄판 누런 종이라 한없이 가벼웁다. 하지만 책이 담고 있는 무게는 대체 몇 톤일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이다. 한 장 넘기면, 다음 장, 다음 장 넘기면 그 다음 장....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성찰과 사유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할 수 없었다. 절판이란다. 나는 다행히 어떤 이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입수하여 읽을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으나, 하지만 이런 수작을 책이 없어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석과 지원이 사랑에 빠지는 아름다운 장면을 발췌해 보았다.


"강기슭에 매여 있는 두 개의 목선이 미풍을 못 이겨 서로의 몸을 부딪는 것 같은 그런 부딪침. 그렇게 무언가, 똑같은 원형질의 존재가 부딪쳐오는 느낌에 지원은 몸을 움츠렸다. (..) 잠에서 깨어난 숲에서 풀잎을 짓이기는 듯한 초록빛 향기가 번져왔다. 강물이 기슭에서부터 뒤채기 시작했다. 발 아래서 노란 애기똥풀 꽃이 하나둘 피어났다.

바로 그 때. 그 순간처럼 삶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때가 있을까. 다른 생의 길을 질주하던 두 영혼이 맞부딪치며 달려오던 가속도로 뒤섞이고 회오리쳐 끝내 분리될 수 없는 새로운 화합물로 변화하는 순간. 그 부딪침은 다른 모든 존재들을 지워버렸다.

두 개의 낯설고 오만한 세계가 섞일 때 저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신생의 별처럼 탄생했다. 낮과 밤이 살을 섞는 일몰의 시간, 혹은 여름과 가을이 서로 섞이는 그 형이상학적인 시간처럼. 연애를 시작하는 두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 두 세계가 부딪치는 순간의 광휘에 먼저 매혹되는 것인지도 몰랐다."(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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