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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나의 종교 - 세기말, 츠바이크가 사랑한 벗들의 기록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오지원 옮김 / 유유 / 2016년 5월
평점 :
제목 : 위대한 예술가들의 진심과 그 소통을 담은 책
<우정, 나의 종교>(슈테판 츠바이크, 유유, 2016)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전두환 회고록 등의 이슈로 인해 ‘전기작가’라는 용어가 익숙한 요즘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오히려 책 속의 대상이 아닌 전기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궁금증과 그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정, 나의 종교>를 소개받았다.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최고의 전기작가’라는 명성을 가진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작가이다. 그는 ‘유럽사를 꿰는 방대한 지식과 탁월한 이야기꾼의 자질로 역사 속 인물의 깊은 내면세계와 심리적 갈등까지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전 세계 독자를 매료시켜’ 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위로하는 정신>, <광기와 우연의 역사>, <발자크 평전>, <메리 스튜어트>,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마리 앙투아네트>, <로맹 롤랑>, <에라스무스 평전> 등의 전기물과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등의 단편 소설, 자전적 삶을 기록한 <어제의 세계> 등이 있다.
<우정, 나의 종교>는 문고판 25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사후, 그가 남긴 에세이 중 일부를 골라 묶은 모음집이다. 부제목은 세기말, 츠바이크가 사랑한 벗들의 기록이며, 그 내용은 ‘강인한 정신과 선한 마음, 지그문트 프로이트’, ‘최초의 보헤미안, 폴 베를렌’, ‘잠들지 않는 예술가, 로맹 롤랑’, ‘삶의 구도자, 레프 톨스토이’, ‘글로 도피한 남자, E.T.A. 호프만’, ‘어떤 고귀한 삶, 알베르트 슈바이처’, ‘젊음의 화신, 바이런’, ‘단상 위의 독재자, 구스타프 말러’, ‘헌신하는 예술, 브루노 발터’, ‘예술이란 오로지 완벽,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괴팍한 완벽주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쓰고, 쓰고, 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까지 열 두명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들의 전 생애, 혹은 찬란한 성찰의 한 순간을 담고 있다.
“참다운 예술가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는 톨스토이(1828~1910)의 가르침에”(p.79) 영향을 받고 세계 1,2차 대전 당시 평화운동에 매진했던 로맹 롤랑(1866~1944), 그리고 그에게 또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 대열에 합류한 츠바이크. 수많은 인물과 넓고 깊게 교류했던 그를 로맹 롤랑은 ‘우정이야말로 그의 종교’라고 말했다. 이 책은 그들이 함께 했던 당시의 흔적이며 그 우정의 기억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공유한 사유와 성찰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톨스토이는 “왜 사는가, 어떤 이유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 현존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분열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p.88)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신앙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곧 기독교, 그리고 국가와 권력, 소유의 모순 즉, 속성을 파악하며 ‘반국가론’에 근거한 조용한 혁명을 주도해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전 세계 수많은 혁명가와 사상가들에게 전파되어간다. 특히, 인도의 3억 동포를 비저항주의로 이끌며 혁명을 성공시킨 간디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문학이 미치는 범위가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이 책은 톨스토이의 이 시점이 기록되어 있다.
또,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함께 했던 시간을 묘사하고 있다. 오르간 선율이 아름답던 그 날 밤의 일화는 그 소개만으로 슈바이처의 사람됨을 파악하는 데 충분했다. 그 자연스러움이 바로 그가 평소 친구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며, 전기작가로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아무도 없는 교회 내부는 이미 어두웠다. 우리는 불을 켜지 않았다. 오로지 오르간 건반 위의 작은 전구 하나만 켰다. 그 전구는 이제 막 건반 위를 움직이기 시작한 슈바이처의 두 손을 비추었고, 명상에 잠긴 듯 아래로 숙인 얼굴은 반사된 빛을 받아 무언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오직 우리만을 위해 밤처럼 어두운 빈 교회에서 그가 사랑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체험이었다! 그날 저녁, 진정한 인간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이 주는 감동은 모든 복잡한 속세의 사정과 정치적인 장애물을 자연스럽게 제거했으며, 우리의 내면을 온기로 데웠다.”(p.141)
마지막 편에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전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고, 이 역시 츠바이크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함께 하고 있다. 아래 발췌는 <말테의 수기> 일부분으로 사물에 대한 릴케의 깊은 이해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츠바이크는 이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문장’이라며 극찬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겨놓는다.
“시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충분히 일찍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와 사람과 사물을 관찰해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새가 어떤 방식으로 나는지 느껴야 하며, 아침에 작은 꽃이 필 때의 움직임이 어떤지 알아야 한다.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낯선 지역의 길과 예상치 못한 만남과 그 다가옴이 보이는 이별을,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의 어릴 적 날들을, 아이를 기쁘게 해 주려던 부모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결국 속상하게 해 드릴 수밖에 없었던 일을, 유난히도 낫지 않던 어린 시절의 병을, 고요한 방에서 보낸 나날을, 바닷가의 아침을, 아니 바다 그 자체를, 바다들을, 여행 가서 보냈던 밤들, 높이 솟아올라 모든 별과 함께 흐르던 밤들을. 이 모든 것을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른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나누던 밤들에 관한 기억이 있어야 하고, 산고의 비명, 자궁문이 닫힐 때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창백하게 잠들던 산모들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죽어 가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 보아야 하며, 열린 창문으로 뭔지 모를 간헐적인 소리를 들어가며 이미 죽은 자와 한방에 앉아 있어 보기도 해야한다. 잊힌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굉장한 인내심도 지녀야 한다. 기억 그 자체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그러다 이름도 잃고 우리 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제야 그 중심에서 시의 첫 구절이 깨어나 얼굴을 내미는 매우 드문 시간이 찾아온다.”(p.227~228)
이렇듯 열 두편의 에세이는 모두 예술가로서의 존경과 인간적인 진실함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몇 인물의 삶에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낼 때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모두 진실함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역자 역시 후기를 통해 츠바이크의 전기가 다른 것과 가장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그 바탕의 대상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과 진한 그리움이 깔려있는 점일 거라고 밝히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진심과 그 소통을 담은 책인 것이다.
통뱔췌 욕구 자극하는 책이다. 각 에세이들은 모두 그들의 사유를 파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깊이 파악하는 데도 무리함이 없다. 더 깊이 알고자하는 토론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도 역시 충분하다. 그들과 같은 시대를 함께 한 츠바이크를 부러워해야할지, 츠바이크와 함께 한 그들을 부러워해야할지 혼란이 인다는 것은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진심은 통한다고 하였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들이기에 가능했을 이심전심의 기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