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2 - 전2권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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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마음을 계속 불안해지다가 뭉클해지다가 답답하지다가 결국엔 미소짓게 하는 장편소설이었다. 이민진 작가가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첫 소설을 써내기까지 11년의 시간동안 겪었던 서러움과 고통의 시간들이 기술된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새삼 그녀의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듯 했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에는 실로 다양한 한국계 미국인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케이시는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로 미국에서 출세가도의 코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찾아 좌충우돌 방황하며 길을 개척하는 여성이다.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맨몸으로 집을 나와서 독립하게 되는 케이시는 사랑하는 미국인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들과 외도하는 그를 목격한다. 배신감과 사랑 사이에서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지만 결국 다정한 한국계 미국인 남자 은우를 만난다. 은우는 직장에서도 잘리고 급기야 도박중독에 빠지게 된다. 케이시는 은우를 안타까워하지만 차마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상황을 개선시키기엔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벅찬 현실이라서 둘 사이는 자꾸 엇나가기만 한다.

주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해보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쉬운 길을 마다하고 곤궁하고 답없는 선택을 주로 하곤 하지만, 그녀의 진정성과 솔직한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찾고 돌보게 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친구 엘라는
안과의사로 미국사회에 자리잡은 부유한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독실한 기독교적인 생활을 하는 살아있는 천사같은 여성이다.
그녀와의 결혼을 본인의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다가오는 하버드 출신의 야심가 테드와 결혼해서 남편과 그의 가난한 부모들까지 정성껏 챙기는 순종적인 삶을 살아간다. 임신으로 고생하던 중 남편이 회사에서 사무보조원과의 성관계를 통해 헤르페스에 감염되었고, 본인까지 감염되어 태아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이후 딸아이의 양육관을 놓고 소송까지 벌이게 된다.

천성이 너무 착한 그녀는 그동안 베풀었던 마음에서 우러난 선행으로 위기마다 뿌린 씨앗이 자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수확으로 거둬들여지는 삶을 산다.

또 하나의 주요한 인물은 케이시의 엄마 리아다.
1967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힘들게 가정을 일구며 남편에게 순종하고 두 딸들을 정성으로 키우는 전형적인 한국여성이다.
남편과 함께하는 세탁소 일 이외에 성심으로 마음을 쓰는 일은 교회 성가대 활동이다. 찰스 홍이라는 젊은 음악가가 새로 부임하는데, 그녀의 재능과 미모 때문에 처음부터 관심을 받는다. 음악과 노래를 향한 마음이 점차 지휘자 선생에 대한 관심과 설레임으로 바뀌어갈 때쯤, 원치않는 사건을 겪으며 일생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민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내가 아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얼마나 복잡다단한 인물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성공하고 동화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소망으로 인해 우리 한국계 미국인들이 자기가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나는 늘 신경 쓰인다. 안전하다고 여겨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거나 표현을 유보하는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의 성격이나 인생을 대신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민진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서 내가 경험해볼 수 없어서 잘 모르던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간접경험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새로워서 흥미로웠고 현실적이어서 감동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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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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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이민진 작가의 첫 장편소설. 파친코만큼 흡입력 있다. 한번 읽기시작하면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 정도. 주인공들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진다.

미국으로 이민가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자리잡고 살아가는 부모세대와 로스쿨 입학허가를 받아놓고도 백화점에서 모자를 만들어 파는 일에 몰두하며 방황하는 큰 딸, 의대 진학해서 모범적으로 얌전하게 의사의 길을 가지만, 언니의 모험적인 행동에 지지를 보내는 작은 딸 네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작가는 특히 전통적인 한국의 유교적 가르침과 미국식 사고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 이민1.5세대의 정서적인 갈등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조명하여 보여준다.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이민사회 안에서 거리낌없이 프라이버시를 넘어서는 질문들이 쏟아지는 상황이 그려지기도 하고, 미국에서 살면서 적응하려고 애쓰면서도 한국인들끼리 결혼하기를 강요하는 부모세대, 외국남자와 사귀는 한국여자들을 색안경끼고 보며 무시하는 한국계 남성들, 경제적인 능력차에 따른 집안끼리의 혼수갈등 등등 미국사회 안에서도 엄연히 살아있는 한국문화를 젊은 이민자 자녀세대가 순순히 납득하고 받아들이기엔 쉽지않았으리라 충분히 공감됐다.

이제 1편 읽었는데 어서 2편 읽어야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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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와 자기결정권이라는 그의 이상이, 색깔만 채우면 되는 간편한 컬러링북처럼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나가기 나름이라는 공허한 관념이 싫었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이나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케이시는 이기적이었고,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쯤이야, 그 정도 도박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지만, 부모님을 계속해서 실망시킨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언제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부모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케이시는 미국인이기도 했다. 행복하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소망이 한국인의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1 | 이민진, 유소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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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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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작가들의 소설은 다 이런건가? 이 책을 쓴 모옌이라는 작가도 그렇고 위화도 그렇고, 정말 이야기의 스케일과 짜임새가 장난 아니다. 장편임에도 중언부언 하지않고 여러 개의 이야기가 힘을 잃지 않으면서 쭉 끝까지 이어지며 흡인력 있게 밀고나가는 것이— 유명한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 ‘붉은 수수’가 모옌의 작품이었다는 걸 이번에서야 알았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는 인구문제 때문에 정부에서 가정마다 자녀를 딱 한 명씩 밖에 낳을 수 없도록 제한한다더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태어난 신분없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이 소설은 그 당시 ‘계획생육’을 담당하던 산부인과 의사 고모가 주인공이다.

20대 아가씨 때부터 무식한 방법으로 출산에 참여하여 산부와 아기를 죽음으로 몰아가던 산파들을 비난하며 새생명 탄생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던 고모가 당의 정책에 따라 불법임신한 여자들을 찾아내 중절시키는 일에 앞장서며 점차 독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작품의 화자인 조카의 부인이 몰래 둘째를 임신하자 중절수술을 집도하다 산모가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른다.

실제 작가의 고모를 모티브로 지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중국의 남존여비사상과 당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인민들, 그 와중에 돈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비인간적인 인신매매•대리모 시장에 관한 현실들. 우리나라 소설 혹은 여타 다른나라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들이라 신기하기도 했고, 한번 읽기시작해서 멈추기 힘들 정도로 빠져들었다. 길지만 지루하지 않았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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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고모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갑자기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고모를 대상으로 쓰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분명하게 나 자신에게 일렀다. 나는 중국 ‘계획생육’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것이며,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을 쓰는 것이라고. 나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쓰기’로 했다. 고모를 원형으로 하고 허구와 상상을 덧붙여 세계 문학에서 일찍이 출현한 적이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인물을 제대로 묘사해 낸다면 소설은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할 것이다. 이렇게 쓴다면 ‘계획생육’은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고,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개구리 | 모옌, 심규호, 유소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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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둥 - 지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10가지 생각의 기둥
얀 로스 지음, 박은결 옮김 / 다산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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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둥 #인문 #책추천 #얀로스 #다산북스 #독서 #책읽기 #북스타그램

빌둥(Bildung)이란 문화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교양’을 일컫는 말. 독일어로 ‘쌓아간다’, ‘형성한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갈고 닦아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도야의 과정을 의미한다.

작가 얀 로스는 2014년 인도의 정치현실을 이해하는데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열쇠가 되어주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 작품이나 사상을 일컬어 '고전'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빌둥'은 이러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독자들이 '고전'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돕기위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썼다고 밝히면서, 아울러 자연스럽게 고전이 교양으로 전이되는 방법을 10가지 주제로 제안한다.

고대 그리스 - 본질의 발견
이야기 -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을 깨우는 법
과학과 철학 -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보는 법
미술 - 나만의 삶의 궤적을 그리는 법
음악 - 내 영혼의 자유를 찾는 법
역사 - 삶에 깊이를 부여하는 법
관심과 호기심 - 도전을 망설이게 하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법
독서와 탐닉 - 나 자신을 지독히 홀로 두는 법
전통과 저항 -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법
감탄과 감동 -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부터의 자극

최근 '고전'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와중에 작가의 집필의도를 읽으니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묘하게 설득되는 부분도 많았고. 막연하게 '고전은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서 구체적인 증거들이 더해지면서 내 믿음에 확신같은 것이 생겼다고나 할까. 특히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정치부 기자라는 작가의 이력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식견들이 10가지 주제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읽으면서 마음에 닿았던 부분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의 이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경탄하는 자세에서 철학이 시작됨을 알았다. 놀랍고 대단한 사실의 이치와 해석을 발견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놀라워할 줄 알아야 한다. 틀에 박히고 무감각해져서는 안 된다. -59쪽

그런데 이처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기존의 세계관과도 강하게 충돌하는 이 지점에서 과학이 지닌 교양으로서의 가치가 드러난다. 몇몇 핵심적인 통찰은 이처럼 세상을 밝게 비추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좌절감과 당혹감을 안긴다. 빛나는 명료함으로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현실을 들추는 것이다. 하지만 교양의 관점에서 보면 환영받지 못하는 생각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과학적 통찰로부터 얻는 가장 큰 이익이 아닌가 싶다. 이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시험과 같다. 지성적으로 편안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고, 건드려서 아픈 곳을 계속 찾아 나서야 한다. -94쪽

역사 인식의 반대 개념은 진보가 아니라 망각인 것이다. -169쪽

인류는 역사를 통해 실패와 승리를 기억하며, 미래를 전망하고 연대할 원천을 제공받는다. 역사는 과거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며 우리 또한 미래를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역사는 우리를 고립과 자기중심성에서 해방시켜 주는 도끼인 셈이다. -172쪽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이해력을 늘리려는 노력이 아니다. 우리와 교양 사이를 이어줄 연결고리를 찾는 시도다. -202쪽

독서는 혼자 하는 활동이지만, 동시에 의견을 나눌 사람들이 필요하고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비평과 공감이 이뤄져야 하는 활동이다. 플라톤이 표현한바 우리는 "언어를 도와야 한다". 또한 적힌 언어를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224쪽

통합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우리가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들을 강제하여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는 뜻일 테고, 또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그들을 멈추게 하는 그들을 바꾼다는 뜻일 테다. -234쪽

시대에 걸맞은 '완전한 교양'은 아래로부터의 관점과 외부로부터의 관점, 관력과 위계질서,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기준에 저항하는 유산들이 포함된다. -236쪽

'저항', '다르게 생각하기', '반대하기'의 고전은 상상력이 위축되는 것을 막아준다. 우리가 의심 없이 도덕적이고 사회적이라고 믿어온 것들의 편협함을 깨고, 배제해 왔던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며, 지금까지 부정당해 온 법적 관리와 삶의 요구를 인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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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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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사기꾼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서 갑자기 '카이저소제'가 떠올랐다. 간만에 흥미로운 한국소설을 만난듯.

'아나스타샤'라는 별명을 가진 가난한 집의 키 크고 예쁘장한 소녀가 삶의 풍파 속에서 방황하다 신분세탁을 통해 몇 가지 인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끝끝내 생명을 살아내는 이야기.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작가인 '나'는 남편과 소소한 갈등을 겪으며 방황하다 우발적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별거상태로 지내고 있다. 남편은 불륜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이혼 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비밀리에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불륜의 증거를 수집한다.

'나'의 부모는 인생말년에 황혼이혼을 위해 소송중이다.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평생 나의 삶을 오롯이 누리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엄마가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것. 배신감을 느낀 아버지가 크게 반발하며 급기야 이혼소송에까지 이르르게 된다.

'나'의 처녀작을 자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며 종적을 감춘 '아나스타샤'를 쫓아가며 그녀의 과거 행적들을 서술하는 큰 스토리와 맞물려 '나' 주변의 이야기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흘러간다. 중간중간 주변인물들의 녹취록 같은 내용들까지 삽입되면서 이야기 구조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야기 자체가 너무 극적이고 흥미로와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로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으로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사이었지만, 알고보면 뭐가뭔지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몰랐었다는 사실에 황당해하고 상대방은 결국 나에겐 이방인 같은 존재였음에 탄식하는 관계들인 것.

태중의 쌍둥이 중 하나를 잃은 아내를 따뜻하게 이해해 줄 줄 알았던 남편이, 일에 집중하라고 개인공간까지 마련해 준 의도가 무색하게 불륜을 벌인 아내가, 노년에 암을 얻은 남편을 기다렸다는 듯 떠나버리려는 아내가, 늙어죽을 때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 끝나버릴게 뻔한 내 인생을 너무나 당연시 하는 남편이. 우리곁에 친밀하게 가까이 있지만 그들은 결국 이방인일 수밖엔 없었던 것인지도.

그러면서도 이 얼떨떨하고 어중띤 관계를 어쩌지 못해 주변만 맴돌고있는 우리에게, 작가는 조용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설명해주는 듯 하다.
모든 것이 다 침몰하고 가라앉은 난파선 위에 펄럭이는 돛. 다 허물어진 다음에라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도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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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나는 『난파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오래전, 그 소설을 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소설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퍼 담기에 급급한 졸작이었다. 하지만 그 미숙한 감상의 이면에는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검은 표지에 새겨진 새하얀 나선의 빛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바다 밑에 잠긴 배 위에 매달린 돛의 음영, 혹은 버려진 책을 집어든 단 한 사람의 공감, 끝없이 실패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제로의 출발선이었다.

친밀한 이방인 | 정한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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