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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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사기꾼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서 갑자기 '카이저소제'가 떠올랐다. 간만에 흥미로운 한국소설을 만난듯.

'아나스타샤'라는 별명을 가진 가난한 집의 키 크고 예쁘장한 소녀가 삶의 풍파 속에서 방황하다 신분세탁을 통해 몇 가지 인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끝끝내 생명을 살아내는 이야기.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작가인 '나'는 남편과 소소한 갈등을 겪으며 방황하다 우발적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별거상태로 지내고 있다. 남편은 불륜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이혼 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비밀리에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불륜의 증거를 수집한다.

'나'의 부모는 인생말년에 황혼이혼을 위해 소송중이다.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평생 나의 삶을 오롯이 누리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엄마가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것. 배신감을 느낀 아버지가 크게 반발하며 급기야 이혼소송에까지 이르르게 된다.

'나'의 처녀작을 자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며 종적을 감춘 '아나스타샤'를 쫓아가며 그녀의 과거 행적들을 서술하는 큰 스토리와 맞물려 '나' 주변의 이야기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흘러간다. 중간중간 주변인물들의 녹취록 같은 내용들까지 삽입되면서 이야기 구조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야기 자체가 너무 극적이고 흥미로와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로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으로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사이었지만, 알고보면 뭐가뭔지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몰랐었다는 사실에 황당해하고 상대방은 결국 나에겐 이방인 같은 존재였음에 탄식하는 관계들인 것.

태중의 쌍둥이 중 하나를 잃은 아내를 따뜻하게 이해해 줄 줄 알았던 남편이, 일에 집중하라고 개인공간까지 마련해 준 의도가 무색하게 불륜을 벌인 아내가, 노년에 암을 얻은 남편을 기다렸다는 듯 떠나버리려는 아내가, 늙어죽을 때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 끝나버릴게 뻔한 내 인생을 너무나 당연시 하는 남편이. 우리곁에 친밀하게 가까이 있지만 그들은 결국 이방인일 수밖엔 없었던 것인지도.

그러면서도 이 얼떨떨하고 어중띤 관계를 어쩌지 못해 주변만 맴돌고있는 우리에게, 작가는 조용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설명해주는 듯 하다.
모든 것이 다 침몰하고 가라앉은 난파선 위에 펄럭이는 돛. 다 허물어진 다음에라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도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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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나는 『난파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오래전, 그 소설을 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소설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퍼 담기에 급급한 졸작이었다. 하지만 그 미숙한 감상의 이면에는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검은 표지에 새겨진 새하얀 나선의 빛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바다 밑에 잠긴 배 위에 매달린 돛의 음영, 혹은 버려진 책을 집어든 단 한 사람의 공감, 끝없이 실패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제로의 출발선이었다.

친밀한 이방인 | 정한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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