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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녹색 바람 ㅣ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평점 :
『별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한창 일본 미스터리가 한국 시장을 뜨겁게 달굴 때, 나도 그에 편승해서 일본 미스터리에 푹 빠져 있을 정점의 무렵에서 무척 재밌게 읽은 본격 추리소설이다. 당시 책을 읽고 작가가 반칙을 했느니마느니 관련 게시판에 말도 많았다.『지나가는 녹색 바람』은 그러한 작가 구라치 준이『별내리는 산장의 살인』바로 전 해(1995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서정적인 제목에 순백의 미소녀를 내세운 표지가 마치 순문학 작품처럼 보이지만 이 책은 엄연히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탐정이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본격추리소설이다.
심령술에 심취한 은퇴한 부동산업자 호조 효마는 영매의 힘을 빌려 고생만 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강령회에 불러내 속죄를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오가는 와중에 별채에서 피살되고...그리고 이어지는 강령회에서의 또 다른 살인...평온한 호조가의 일상을 뒤흔드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누구인가.
이 책은 기존 본격추리물과 패턴이 조금은 다르다. 보통 본격 추리물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탐정이 등장해서 수사를 통해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이 책은 탐정이 마지막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고, 중간 부분은 호조가 사람들과 두 명의 젊은 대학 연구원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런 점이 본격을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미스터리에 천착하는 작가의 차별화된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몸이 불편한 사에코의 순수한 짝사랑과 그런 그녀를 연민의 정으로 보살펴주려는 사촌 오빠 세이치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는 가운데,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강령회를 통해 집안에 도사리는 사악한 기운을 퇴치하려는 영매에 맞서 초현실 세계를 일절 부인하며 영매의 행동이 사기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두 연구원의 팽팽한 기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영매가 주관하는 강령회 장면이다. 암막을 쳐놓은 깜깜한 방안에서 관련자들이 모두 모여 죽은 자를 불러내는 강령회의 신비하고 생동감있는 묘사가 긴장감을 자아낸다. 과연 영매의 트릭이 무엇인지, 또 다른 희생자가 누가될지...마치 내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듯 동작 하나, 호흡 하나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늘그막에 나타난, 세이치의 대학 선배인 탐정역의 네코마루가 관계자들 앞에서 펼쳐보이는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이다. 뜨내기에 독설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풋내기 아마추어 탐정이지만 "이 이상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견고한 논리와 명쾌한 추리로 사건의 진상을 풀어낸다.
이번에도(?) 사건의 양상을 좌우하는 결정적 단서가 뒤늦게 공개돼 논란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ㅎㅎ 사랑에 빠진 처녀의 애틋한 마음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사에코의 1인칭 시점에 그런 복선이 숨어있다니...반칙 아니면 교묘한 테크닉, 둘 중 하나인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알리바이 트릭, 독살 트릭, 강령회의 트릭등 선보이는 다양한 트릭들이 그동안 일본 추리물에서 접해보지 못한 참신한 트릭인지라 나름 신선하고 만족스러웠다. 요즘 일본 본격추리물 출간이 뜸한 가운데 오랜만에 트릭과 사건 풀이에 집중하는 재미난 작품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