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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추리작가이자 평론가인 노리즈키 린타로의 2013년 신작으로 일본 출간 당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등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표제작『녹스 머신』과 2부격인『논리 증발 - 녹스 머신 2』,『바벨의 감옥』등 중단편의 SF 모험 소설 (개인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이라 부르기는 조금 어렵다) 세 편과『들러리 클럽의 음모』라는 중편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 출간된 작가의 작품은 - 최근 구매한『또 다시 붉은 악몽』을 제외하고는 - 모두 읽었다.『킹을 찾아라』와 단편『이콜 y의 비극』은 트릭과 반전에 공을 들인 본격 추리물이고 '비극 3부작'과『잘린머리~』는 등장인물간의 갈등에서 오는 긴장감을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틱한 전개로 풀어가는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로 고뇌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 작가의 고전 추리작품에 기반을 둔 SF소설은 어떤 내용일까.
일단 표제작인 단편『녹스 머신』은 수작이다. 2058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시간공학,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이론을 이용, 양방향 시간 여행이란 놀라운 과학적 실험을 통해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된다."는 녹스의 십계명을 만든 카톨릭신부이자 추리소설가인 로널드 A. 녹스를 만나러 1929년의 과거로 떠나는 모험담은 시종일관 흥미를 자아낸다. (사족이지만, 녹스의 십계에서 중국인 운운은 "그 당시 중국인은 마술을 부릴 줄 안다" 선입관이 있어서 그런 조항이 삽입된걸로 알고 있다. 아니면 말고...)
2부격인『논리 증발 - 녹스 머신 2』역시 양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주요 하드웨어인 전자 텍스트의 발화 사건에 엘러리 퀸의 국명 미스터리중 유일하게 '독자와의 도전'이 누락된『샴쌍둥이 미스터리』와 연계시킨 모험담으로 그 독특한 아이디어와 해결법에서 인상깊게 읽었다. 하지만 각종 물리학 이론이나 난해한 컴퓨터 용어등이 다소간 작품의 이해와 몰입을 방해한다.
유일하게 SF물이 아닌『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명탐정의 친구이자 조수들의 모임인 들러리 클럽 멤버들과 당대 최고의 추리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와의 한 판 대결을 풍자와 패러디로 꾸민 콩트 형식의 재미난 작품이다. 회장 왓슨부터 헤이스팅스, 밴 다인, 네로 울프의 조수 아처 굿윈 그리고 피터 웜지경의 집사 머빈 번터등 반가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정통 추리소설에서 감초 역할이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그들에게 크리스티 여사의 걸작『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부터 그들의 존재감 및 나아가서는 정통 추리소설 기법의 뿌리까지 위협받고...실제 발생한 크리스티 여사의 실종 사건을 들러리 클럽의 음모와 연계시킨 아이디어는 신선했다. 막판에 가벼운 살인사건을 집어넣어 본격 추리의 맛을 조금이나마 느끼게한 작가의 재치도 돋보이고. 서양 고전 추리소설의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었던 발칙하고 재미난 작품이다.
문제는 가장 짧은 단편인『바벨의 감옥』. 시공간의 감옥에 갇힌 '나'가 형상(거울에 비친 상)인 경상인격(또다른 나)과의 교신을 통해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인데...일본어 세로글씨를 이용한 암호 트릭이라는데 두 번을 정독해 읽었지만 당체 이해 불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각기 다른 시공간이 조우하는 장면처럼 시각적 이해가 아니고서는...국내 독자가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작품으로 번역가의 고생이 눈에 선하다.
한마디로 (추리 소설) 매니아 작가가 매니아 독자를 위해 쓴 매니아적인 작품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등 서양 고전 추리물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게 뭐지? 하고 읽을 수도 있지만 고전 추리물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재미난 작품이지않나 싶다.
물론 2058년 배경의 SF물인만큼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시간 공학등 각종 첨단 과학 이론과 난해한 컴퓨터관련 용어등이 독서를 어렵게 만든다. 오죽하면『흑사관 살인사건』을 완독했을 때의 악몽(?)이 떠올랐을까. 어쨌든 고전 추리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첨단 미래 과학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기발한 상상력과 뛰어난 논리력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창출해낸 작가의 실험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