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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988년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활약하는 하드보일드물『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로 데뷔해 이듬 해『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상을 거뭐진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자 시즌 1의 완결편. 5년의 구상끝에 1995년에 내놓은 작품으로『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은 그가 경애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사랑>과 <빅 슬립>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책을 집어드니 일단 57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의 무게감과 하드보일드풍의 우직하고도 담백한 문체가 나를 반긴다. 이 책에는 본편인『안녕, 긴 잠이여』외에도『세기말 범죄 사정 - 죽음의 늪에서』라는 11쪽 분량의 짦막한 토막 소설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사백여일의 공백기를 뒤로 하고 도쿄 신주쿠의 사무실로 돌아온 탐정 사와자키. 그에게 고교 시절 승부 조작설에 연루되 옷을 벗어야 했던 전직 고교야구 선수 우오즈미 아키라가 11년전 자살로 처리된 의붓누나 유키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해 온다. 한편 니시고리 경부와 야쿠자 하시즈메 일당은 각성제 3킬로그램과 일 억엔을 챙기고 사라진 사와자키의 옛 파트너이자 사수인 와타나베의 행방을 대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데...
전직 야구선수와 감독, 노숙자, 야쿠자, 경찰, 전통 예술 가문등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하고 이야기는 지역 조폭이 연계된 고교야구 승부 조작부터 전통 예술인 노가쿠를 공연하는 오쓰키 가문의 후계자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며 진행된다. 그러면서 유키의 자살 사건을 둘러싸고 승부 조작에 연류된 사람들과 각각의 가문과 집안의 당시 처해진 사정과 이해 타산등이 맞물려 11년간 숨겨왔던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화자이자 주인공인 탐정 사와자키이다. 40대 중년의 적지않은 나이로 조수나 파트너없이 일천 이백만 도쿄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고독한 하이에나같이 묵묵히 사건을 처리해가는 사와자키. 때론 능글맞게, 때론 연예인 뺨치는 능숙한 연기력으로 때론 윽박지르고 때론 타협하며 속으로는 바지에 오줌쌀 정도로 쫄아있어도 겉으로는 태연한척 강한척 그러다가 불시의 습격에 황천길 문턱에도 가는등 산전수전 다겪는 주인공을 보니 못내 가슴이 아려온다. 탐정이란 직업 역시 영화에서나 근사하게 표현될 뿐 현실에서는 경찰에게는 눈엣가시요 조폭에게는 만만한 먹이감, 심지어 일반인에게조차 따가운 시선을 받는 처량한 직업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야 사건의 결정적 역할을 하는 오쓰키 가문의 뜬금없는 등장과 결말에서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에서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의아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그런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스토리는 묵직하고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특히 의외의 결말을 보여준 사건의 진상을 보면 하드보일드물의 묵직한 맛 외에도 본격 추리의 재미도 들어있다.
40대 후반의 몸으로 누구 하나 의지하거나 믿는 이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직관, 경험을 무기로 세상의 벽과 부딪혀 나가는 마초 탐정 사와자키. 그런 사와자키의 묵묵한 행보가 21세기 경쟁사회를 홀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자화상이 아닐까...그가 활약하는 또 하나의 장편 『어리석은 자는 죽는다』를 어서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