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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쐐기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제가 사실 경찰소설은 별로 안좋아합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작가에 유명한 시리즈 그리고 좋아하는 출판사라서 호기심에 믿고 구매했습니다. 경찰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에드 맥베인은 필명으로 1956년 발표된 1권 『경찰 혐오』를 시작으로 작가가 암으로 사망한 2005년『Fiddler』까지 총 57편의 '87분서 시리즈'를 남겼습니다. 반세기 동안 시리즈를 이어온 작가의 노력과 역량이 놀랍네요.『살의의 쐐기』는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으로 1959년작입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10월 어느 화창한 금요일 오후 87분서 안에서 한 여인이 경찰들을 담보로 벌이는 반나절의 인질극이고 또 하나는 스티브 카렐라 형사가 단독으로 수사하는 부자 노인의 자살로 위장한 밀실에서의 살인사건입니다. 스릴러와 본격추리물의 결합이랄까요.
교도소에서 병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이 총과 폭탄(니트로글리셀린)으로 무장한 채 남편을 체포한 스티브 카렐라 형사를 죽이겠다는 복수의 일념으로 87분서를 급습합니다. 여성 단신의 몸으로 건장한 경찰 서너 명을 그들의 홈그라운드에서 몇시간 동안 제압, 통제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겠는가~하는 의문이 들지만...그러한 그녀에게 힘 한번 못쓰고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며 괜히 비밀스런 대응책을 시도하다 오히려 응징을 당하는 경찰들이 한없이 인간적이고 애처러워 보입니다. 한편, 87분서 내의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도 모른채 스티브 카렐라는 부자 노인의 석연치않은 밀실에서의 자살 사건(?)을 단독으로 조사합니다.
87분서 소속 경찰들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홈즈같은 천재적 추리나 람보같은 근육질 액션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임신한 약혼녀, 집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는 평범한 우리 이웃들입니다. 이 책의 묘미는 그러한 경찰들이 일상에서 겪는 현장의 상황을 과장된 액션이나 자극적인 묘사없이 리얼하게 드라마로 재현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인질극이 벌어지고 자칫하다간 건물이 통채로 날아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딱히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주범이 연약한 여자 한 명이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느 순간에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어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예측가능한 결말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시각 생생하게 묘사되는 현실감있는 상황 전개가 이야기에 몰입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마이어 형사가 외부로 몰래 던진 긴급 요청 메세지의 운명을 통해 작가 특유의 위트가 보이고 남편을 잃은 미망인, 가난한 조국을 그리워하는 푸에르토리코 창녀, 위험에 빠진 약혼자를 위해 희생하려는 약혼녀 등 세 여자의 밀고당기는 장면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이 책에서 '쐐기'가 두 가지 용도로 쓰이더군요. 한 가지가 비유적인 의미라면 다른 한 가지는 상당히 직접적이네요.
놀라운 반전이나 화끈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에 땀을 쥐는 스피디한 전개도 없지만 '87분서 시리즈' 명성에 걸맞는 재미는 충분히 맛볼 수 있었습니다. 87분서 소속 모든 경찰이 주인공인지라 시리즈 첨부터 그들과 함께 동화되며 순서대로 읽으면 더욱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87분서 시리즈'에 정통한 편집자의 후기를 보니 시리즈의 탄생부터 집필 과정과 변화, 특성 등 시리즈의 역사와 배경이 잘 요약, 소개되어 있어 이 시리즈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번에는 제대로(?) 된 범죄자와 맞서는 87분서 경찰들의 활약상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