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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환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9년 8월
평점 :
나는 주말이면 산에 간다. 등산 입문한지 7년쯤 된 것 같다. 평상시는 가까운 청계산, 관악산을 주로 가고, 가끔가다 멋진 경치 보러 북한산을 찾기도 한다. 물론 더 가끔가다 버스에 몸을 싣고 원정 산행을 떠나기도 한다. 여름에는 당근 물이 있는 시원한 계곡 트레킹이 일 순위이다. 내 주변을 보면 히말라야 같은 해외 원정 트레킹을 다녀오는 무리들도 있는데 나는 아직 돈, 시간, 열정을 투자해서 다녀올, 그 정도 수준의 마니아는 못된다. 그래도 산악 관련 저서나 다큐멘터리 등을 볼 때면 해외 명산을 체험하고픈 로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마스다 나오시는 히말라야 칸첸중가 등정 도중 눈사태로 사망한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부분이 날카롭게 절단된 자일을 발견한다. 그리고 드는 강렬한 의혹...누군가 형의 자일에 인위적으로 칼집을 냈다. 형은 사고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악의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가. 마스다는 두 명의 생환자를 통해 진실을 추적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완벽히 엇갈린다. 여기에 산악 전문 기자 출신 잡지사 여기자가 조력자로 등장한다. 마스다와 여기자는 서로 합심해서 두 생환자의 주변을 조사하고 결국 최후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히말라야 칸첸중가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생환자>는 산악 미스터리이다. 좀 더 풀어쓰면, 추리 요소가 적당히 가미된 산악 모험소설이다. 산에서는, 특히 히말라야의 8천 미터급 고산에서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산악인들의 무수한 모험담과 드라마가 탄생한다. 이 작품 역시 산악인들 저마다의 사연과 철학이 담긴 드라마가 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Survivor's guilt. 즉, '생존자의 죄책감'이다. 희생자를 동반한 생환자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진상은 계속해서 바뀐다. 그야말로 반전의 연속이다. 히말라야 설산은 열린 폐쇄 공간이다. 목격자와 증인이 없어 진실은 설산 한가운데 묻힐 수밖에 없다. 믿는 것은 생환자의 증언뿐이다. 누구 말이 진실이고 누구 말이 거짓인가...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바로 등반의 탁월한 묘사에 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영하의 날씨에 히말라야 고산의 빙벽에 매달려 아이스 액스로 빙벽을 찍고, 카라비너를 박아 자일로 연결해 지점을 확보하고 한 걸음씩 전진하는 산악인의 흐르는 땀과 거친 숨소리, 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워낙 묘사와 표현이 리얼한지라 작가가 전문 산악인인줄 알았는데 단지 참고 문헌과 전문가를 통해 이런 생동감있는 산악 미스터리를 썼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그동안 수많은 미스터리를 읽었지만 산악 미스터리는 처음이고, 그 이유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게다가 미스터리의 재미와 드라마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괜히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오른 게 아니다. 마지막 기억나는 단어는 '트러스트 폴' (trust fall)이다. 파트너를 믿고 추락하는...나에게도 그런 신뢰할만한 동반자가 있을까? 요즘 같은 무더운 여름에 히말라야 설산을 배경으로 한 서늘한 미스터리 한 권을 읽으니 무더위가 확 달아나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칸첸중가 설산의 차가운 냉기가 불어오는 듯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