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 / 스핑크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제가 그 사람을 죽였나요? 아니면, 그 사람이 목이 잘린 채로 저를 안고 걸어 나온 것일까요?" 15년 전,  폐쇄된 산골 마을의 신흥 종교 단체의 집단 자살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성이 탐정 사무소를 찾아와 그날의 흐릿했던 해괴망칙한 기억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의뢰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해 아무것도 안 남는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라며 기적의 논리를 믿는, 아이돌 뺨치는 외모의 미청년 탐정은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후에 의뢰인에게 결과를 보고한다. 그것은 그 어떤 트릭도 없는 순수한 기적이었다고...(세상에나...기적을 믿는 탐정이라니...ㅠ)

그러자 "사기 치지 마라. 기적은 없다 "라고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며 나타난 검사 출신의 노인. 그는 오로지 가능성만을 따져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황당무계한 수준의 가설을 제시한다. 하지만 탐정은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라는 시크한 멘트와 함께 상대의 가설을 논리적으로 철저히 분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도전자의 등장과 제시되는 역시 황당한 수준의 새로운 가설... 하지만 이 또한 탐정의 "그 가능성 역시 이미 떠올렸다"라는 시그니처 멘트와 함께 논리적인 반론에 꼬리를 내리고....

기적을 믿지 않는 자의 계속되는 도전과 기적밖에 없다는 탐정의 응전. 가능성만 믿고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자와 논리적으로 철저히 방어하는 자. 이 화려한 추리 대결의 끝은 어디일까. 정말 기적이 일어나서 그 소년이 머리가 잘린 채로 다리를 다친 소녀를 안고 집단 자살 현장에서 탈출한 걸까...

한마디로 현란한 추리 대결이 펼쳐지는 한 편의 무협 드라마를 본 느낌이다. 고전 문헌과 각종 역사적 사실과 지식들을 인용한 현학적인 대사들이 난무하고, 가설 위에 새로운 가설, 반론 위에 새로운 반론, 부정의 부정 등  매 라운드에 걸쳐 다양한 추리가 판을 친다. 특히 세 번째 도전자의 가설은 그 개연성과 가능성에 있어서 감탄을 자아낸다. 비록 탐정의 논리적인 반증에 그 즉시 부정되어지는 운명이지만...

막판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과 뒷배경이 밝혀지는데 아마도 속편을 위한 포석이리라. 라노벨스러운 가볍고 코믹한 문체와 분위기가 때론 추리의 진중함을 방해하지만 딱히 걸림돌은 안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도전자를 물리친 탐정이 최후로 밝히는 사건의 전모...그것은 과연 기적의 증명일까...하지만 이 역시 숭고한 희생정신이 깃든 또 하나의 서글픈 가설이리라...어쨌든 첫 번째 도전자의 가설부터 마지막 탐정의 결론까지 다양한 추리를 검증, 대조해가며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데뷔 2년 차인 2015년에 발표해서 "제16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후보에 올랐다. 당시 수상작은 <죽음과 모래시계>. 두 작품을 비교해 보니, 수상작이 의젓한 범생이 스탈이라면 이 작품은 천방지축 통통 튀는 날라리 스탈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이듬해 속편 <성녀의 독배 -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로 "2017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본격물에 매진하는 신인 작가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고, 당연히 속편도 조만간 국내 정발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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