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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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 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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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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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떄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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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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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좋았다. 이 사람의 내부에는 빈방이 참 많구나. 내면에 있는 빈방. 내가 하릴없이 좋아하게 되는 건 그런 종류의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빈방이 있다면, 그 방에 과묵하고 고독한 손님을 들이고 싶었다. 낯선 손님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과거의 행적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침착한 공기와 평화로운 시간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목적의 전부인…… 그런 방이기 때문에. 갓 빨아 낸 신선한 모포의 향기가 떠도는 무채색의 방이기 때문에.

낯설고 과묵하며 선량한 이들이 조용히 묵어 가는 그런 공간을…… 나는 상상했다. 방이 하나 둘 늘어나면 나중에는 커다란 호텔이 될지도 모른다. 고요한 손님들이 늘어나고,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면 나는 어느 새벽, 그 호텔의 허름한 입구를 걸어 나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작은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아무런 회한도 없이. 또 다른 낡고 허름한 방을 만들기 위해서. 

김의 내부에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공기가 떠도는 큰 방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 방의 공기를 조금씩 호흡하며 주어진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과묵한 손님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묵어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희망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희망은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좋았다. 그런 희망은 사람을 좌절시키지 않고,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하지 않고, 죽게 만들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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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책섬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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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초에 걸렸어. 책을 파다 보면 반드시 문제란 걸 맞닥뜨리게 돼.

물론 그 문제를 피해 나머지 부분만 팔 수도 있어.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문제가 생각보다 클 수도 있고.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안 되겠다는 느낌이 강해진단다.

문제 위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살아 움직여.

넌 그것과 씨름해야 해.

그건 도깨비 같아서 동물이 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자빠뜨려 보려고 해도 여의치 않고,

두 다리 버티고 있기도 힘들지.
힘이 빠져 울고 싶어도 물고 늘어져야 해.
넘어가면, 지금까지 쌓은 걸 녀석이 모두 망칠 수 있어.

이 결투는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

쓰지 말 이유는 수만 가진데,
써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그래도 의지는 네 편이고
그게 널 버티게 하지.

문제 해결? 그건 다름 아닌 직면이야.
끝없는 직면.
직면한 채 문제가 던지는 모든 자극에
끝까지 반응할 수 있느냐.

질기게 버티면 어느 순간 제 풀에 지쳐서
너를 피해버리지.

문제란 그런 거야.
문제도 너에게 질릴 수 있는 거지!

근데 여기서 힘을 많이 빼게 되어 있어.
연료 탱크의 반 이상을 써버리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문제는요? 어찌 됐죠?"

가버렸어. 근데 멀리 안 갔어.

"괜찮은 거예요?"

뻐근하진 하지만… 일어나야지.
곧 다시 올 거고,
그땐 나도 힘이 없을 거야.
시간을 좀 번 것뿐이니 다시 오기 전에
작업을 완수하고 여길 뜨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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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3월
 


점심 무렵이 지나서 엄마 요양원에 갔다. 민머리에 모자를 쓰고 갔다. 엄마는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해서 엄마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는 내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있네."
"엄마 남편은 사노 리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 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하는 건 뭘까. 설마 엉큼한 그것일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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