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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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쓸쓸한 구석에서 만난 이들이 살 비비는 풍경은 이렇게 서로 닮고 만다. 가진 것은 몸뿐,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

그래, 신파 맞다. 맞긴 한데, 그게 또 싫지가 않은 것이다. 뭐랄까, 아늑한 신파라고 할까. 누구에게나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외로운 날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 「여인숙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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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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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들은 감히 심중을 헤아리거나 예측할 수 없음. 그것이 노인들의 매력이다. 페루의 마누Manu 정글에서 만난 마치젱가Machiguenga 부족의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분에게도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말수가 너무 적어 일찌감치 포기하고, 대신 낚시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낚시 운도 따르지 않아 고기가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한참 후에 왜 그런지 물어보니 원래 낮에는 입질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말씀해 주시냐, 진작 알았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하고 물을 순 없었다. 노인이 촬영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우린 낙담해 버렸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나 할애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으니. 작별 인사나 하려고 일어섰다. 대답이 돌아올 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럼 잘 계시고, 건강하세요."라고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깊고 정이 듬뿍 담긴 눈빛을 반짝이며 딱 한마디.

"언제 또 올 건데?"

그 목소리엔 도시인들에게 익숙한 '언제 한번 보자.'나 '볼 수 있으면 보자.' 식의 무성의한 빈말과는 차원이 다른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당황한 나는 "아, 네, 가능한 한 빨리 와야죠......." 라며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 노인의 만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엄청난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았다. 노인의 그 한마디는 '아무것도 못 건졌잖아, 시간만 낭비했어.'라는 건방진 생각이나 품었던 내게,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뭐가 중요한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목적에만 집착하고 있던 내게 주어진 과분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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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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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선(善)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악을 통해서 선을 보는 거죠. 어디선가 악은 악을 바라보는 그 눈 속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그 반대의 경우죠. 선은 악을 바라보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어요. 악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어요. 모든 게 그 눈 속에 있죠. 하지만 그 눈은 언제나 속고 말아요. 진실을 보지 못하죠.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눈은 몰라요. 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가요. 저건 속임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게 몇 번이나 반복되죠.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땐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려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조차 확신할 수 없어요.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려요. 자기 자신이 뭘 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앞으로 뭘 하면 되는지. 그런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어요? 이건 남우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아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죠. 사실 도움을 받아야 했던 건 남우가 아니라, 우리였어요. 반 아이들이었죠.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했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 변호사님은 그런 걸 상상할 수 있나요?"


잠시 후 변호사가 말했다.


"그건 법적인 질문이니?"


그녀는 웃었다."


"물론 아니죠. 이건 법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신에 관한 얘기겠구나."


"아뇨. 그냥 마술사에 관한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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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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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출발하기로 하고 마당으로 나섰다. 고추밭 주인이 전구를 켜서 마당을 밝혔다. 고추며 감이며 고구마며 호박이며 그 많은 자루를 싣고 보니 차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타이어 아래쪽이 빵빵하게 눌려서 못이라도 박히는 날엔 속절없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내 팔뚝을 톡, 톡, 두드렸다. 노부인이 내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고 말했다.


자고 가.


밥 줄게.

누군가 도와줬으면 해서 둘러보았지만 오제도 오제의 어머니도 짐을 확인하느라고 바빴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 있다가 다음에 와서 자고 갈게요, 라고 말했다. 몇 겹으로 왜곡된 안경 속에서 노부인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


오긴 뭘 오냐 니가, 라고 토라진 듯 중얼거리는 할머니 앞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자 약속도 아닌 약속을 해버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오제의 어머니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머리를 내밀더니 할머니, 우리 이제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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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eBook]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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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여자들이 제 흥에 겨워 우리를 껴안곤 했다. 더운 숨결이 목에 와 닿을 때면 고추가 단단해졌다. 날마다 남자를 겪는 여자들의 손길에는 분명 특별한 에너지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숨조차 쉴 수 없도록 품 안 깊숙이 나를 안아주는 자세를 좋아한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세상 그 누구도 여섯 살의 내가 경험한 원초적 흥분을 재현해줄 수 없다는 것을.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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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