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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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참, 인생이란 허망하군." "그만둬. 분위기 식잖아." "이 녀석은 옛날부터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이었어. 이제 와서 그런 애송이 같은 소리 해봤자야. 유아퇴행인가." "어쨌든 환갑이잖나." "그랬나, 환갑이라는 게 그런 거였군." "그러니까 우린 다시 청춘 시절을 반복한단 거야." "영겁회귀야." "젊음은 없고 고민뿐이라니 지옥이 아닌가." "밤이라서 그래." "뭐가 말인가." "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고." "그건 정말 안 좋아. 위험한 징조야." "자식들이 훌륭하게 자라지 않았나. 그것으로 됐다고 쳐야지." "그놈들 인생은 그놈들 것이고, 나하고는 상관없어." "당치않은 부모군." "어이없어하지 마." "환갑이 돼도 잘 모르겠어. 인생이란 뭐냐고." "인생의 목적이란 뭐냐." "나 하나 번식하라야." "바보 같아." "이제 와서 인생을 논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논하다가 죽어버릴걸." "죽는 건 무섭지." "나이를 먹으면 죽는 게 무섭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갈수록 더 무서워져 나는." "글쎄. 나는 그렇지도 않아." "자넨 옛날부터 그런 사람이었어." "생각하면 신기하지 않나.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먼지였어. 죽어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 사람이라기보다는 먼지인 쪽이 훨씬 길어. 그렇다면 죽어 있는 것이 보통이고 살아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예외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니 죽음을 무서워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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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1월
 
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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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에게는 희망이라고는 거의 없다. 전에는 그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했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나도 몰랐다. 그러나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것.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생은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어야 했고 나는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찾아다녔다. 

나는 이제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방안에서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바깥세상에는 그럴듯한 어떤 인생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서 무언가 별볼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나는 그런 일에 관심 없다.

나는 내 집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다. 나는 꿈이 거의 없다. 내가 무엇을 꿈꿀 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을 뿐이다. 잘 지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앉아 있는 일 외에 더 나은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몇 시간씩 또는 며칠씩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하기위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도 찾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거리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물론 주변 정리를 하거나 청소를 좀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차라리 더럽고 무질서하게 사는 편이 낫다.

나는 창문이라도 열기 위해 일어나야 했다. 담배연기, 썩은 냄새, 곰팡내를 없애기 위해서. 그런 냄새 때문에 불편할 것은 없다. 아니, 약간 불쾌하긴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냄새에 익숙해져서 사실은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지낸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 누구라도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어떠나 하는 것뿐......

그러나 그 '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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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핸드메이드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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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때 나는 고양이였다. 불우한 거리의 고양이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거둬들여 성범수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이고, 오랫동안 보살펴주었다. 내게서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인가? 맞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 나는 당신의 외로움이었다고, 그리고 이제 많이 진화했다고. 내 말 알겠는가? 시간은 저 혼자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늘 우리의 선택과 함께 흐른다. 침대 위에 눕기로 결정했다면, 침대 위에 누운 시간이 흐른다. 술을 마시기로 결정했다면, 술을 마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시간은 늘 그런 방식으로 흐른다. 그리고 한번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돌아갈 기회가 너무나 많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온도조절판이 망가진 철제 다리미나 화분 옆의 벽돌이나 회색 캐리어 따위를 줄기차게 선택함으로써, 그러지 않았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파국을 차곡차곡 불러왔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오늘이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시간은 멋대로 되돌리라고 발명된 게 아니다. 시간 사용법은 그보다 훨씬 비정하다. 



-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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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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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 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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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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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떄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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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1-2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