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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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어쩌다가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대신 화장품을 팔러 밖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었다. 나는 누에처럼 엄마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다.

언젠가 오함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다 온 집 안에 비린내가 진동한다며 투덜댔다. 엄마가 방금 전 프라이팬에다 큰 자반고등어 한마리를 구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퍼뜩 그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오래 전, 집에서 자주 벌어지던 소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를 포함해 식구들은 모두 비린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나는 유독 고등어나 갈치 같은 비린 생선을 좋아해 엄마는 식구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나를 위해 자주 고등어를 굽곤 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상위에 올라와 있는 반찬들이 모두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욱국과 고들빼기김치, 조개젓과 감자조림, 뱅어포 등 무엇 하나 특별하달 게 없는 음식들이었지만 이십 년이 넘은 그때까지도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잊지 않고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 식탁 위에 고개를 박고 서둘러 수저를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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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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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부터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지수함수적指數函數的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을 밝히는 일을 주저했습니다. 그런 감정적 협잡물이 나날의 영위에 섞임으로써 우리의 지적활동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나는 연구소라는 시공을 가지고, 유사 리만Riemann 다양체를 이용해 기술하는 일을 시도하여 일반상대성이론을 증명하는 등 다양한 수학적 시도를 거듭한 결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오른쪽 비스듬히 뒤에서부터 증명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연구소 내의 특정 영역에서는 러시아의 수학자 메레기에프가 예상했던 대로 항상 단순 βM구조가 성립함을 증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지극히 한정된 시공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준公準이 성립되지 않고 호프머 나선은 뒤집어지고 테러바초 타원은 하트 모양이 되고 두 개의 평행선은 반드시 만나고 곰보자국은 보조개가 되고 남녀는 반드시 맺어집니다. 이것은 요컨대, 당신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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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2월
 
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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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육체적인 단어다. 헤어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단어의 물리적인 실체가, 거리에 대한 실감이, 박상훈을 괴롭게 했다. 사흘이 지나자 어딘가 아파왔다. 아프긴 했지만 상처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 뼈를 헤집어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는 계속 이동했다. 때로는 무릎이 아팠고, 때로는 등이 아팠고, 때로는 발뒤꿈치가 아팠다. 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몸이 아팠다. 모든 고통은 이별로부터 왔다. 닷새가 지나자 모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걷고 있다는 게 기적 같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통은 산발적이었지만 끊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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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9월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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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를 본 지 벌써 10년이 흘렀네요. 보푸라기 인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책가방을 메고, 알람 소리 어지러운 육교를 지나 '노량도'에 입성한 게 엊그제 같은데. '합격해야 탈출할 수 있는 섬'이라고, 다들 그런 식으로 우스갯소릴 하곤 했잖아요. 그때는 언니가 되게 언니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저도 서른이네요. 그사이 언니에게도 몇 줄로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겠죠? 바람이 계절을 거둬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 테죠? 단순히 '기회비용'이라고만 하기엔 아쉽게 놓쳐버려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도. 말해도 어쩔 수 없어 홀로 감당해야 할 비밀과 사연들도요. 그래서 사실 오늘 언니가 8년 동안 임용이 안 됐었단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어요.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 생기는 온갖 기대와 암시, 긴장과 비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꽤 아는데. 자식 노릇, 애인 노릇 등 온갖 '도리'들을 미뤄오다 잃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닌데. 좁고 캄캄한 칸에서 오답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혼자 나이 먹어갔을 언니의 청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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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7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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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하기도 쪽팔리지만 새로 들어간 그 회사에서도 나는 나보다 경력도 적고 직급도 낮은 연하의 남자 하나를 사랑했다가 혼자 쓸쓸히 마음을 접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른바 짝사랑 전문가였고 그쪽 분야에만 오래 전념해오다보니 다른 분야는 아예 자신도, 관심도 없게 되었다. 짝사랑만의 도저한 쾌감이랄까, 뭐 그런 것에 중독되다보니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짝사랑만 가능한 대상을 물색하여 거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아이돌 댄스그룹 멤버에게 몰두하거나 내 평생 영원히 만나게 될 것 같지 않은 대만 텔레비전 드라마의 남자 배우를 남몰래 흠모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보니 어느새 나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거울 속의 저 아줌마는 과연 누굴까? 루이뷔통 스피디백을 들고 어디든지 출동할 자세가 되어 있는 머리 질끈 동여맨 전투적인 여성이 정말 나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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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