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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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선(善)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악을 통해서 선을 보는 거죠. 어디선가 악은 악을 바라보는 그 눈 속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그 반대의 경우죠. 선은 악을 바라보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어요. 악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어요. 모든 게 그 눈 속에 있죠. 하지만 그 눈은 언제나 속고 말아요. 진실을 보지 못하죠.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눈은 몰라요. 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가요. 저건 속임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게 몇 번이나 반복되죠.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땐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려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조차 확신할 수 없어요.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려요. 자기 자신이 뭘 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앞으로 뭘 하면 되는지. 그런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어요? 이건 남우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아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죠. 사실 도움을 받아야 했던 건 남우가 아니라, 우리였어요. 반 아이들이었죠.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했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 변호사님은 그런 걸 상상할 수 있나요?"


잠시 후 변호사가 말했다.


"그건 법적인 질문이니?"


그녀는 웃었다."


"물론 아니죠. 이건 법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신에 관한 얘기겠구나."


"아뇨. 그냥 마술사에 관한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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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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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출발하기로 하고 마당으로 나섰다. 고추밭 주인이 전구를 켜서 마당을 밝혔다. 고추며 감이며 고구마며 호박이며 그 많은 자루를 싣고 보니 차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타이어 아래쪽이 빵빵하게 눌려서 못이라도 박히는 날엔 속절없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내 팔뚝을 톡, 톡, 두드렸다. 노부인이 내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고 말했다.


자고 가.


밥 줄게.

누군가 도와줬으면 해서 둘러보았지만 오제도 오제의 어머니도 짐을 확인하느라고 바빴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 있다가 다음에 와서 자고 갈게요, 라고 말했다. 몇 겹으로 왜곡된 안경 속에서 노부인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


오긴 뭘 오냐 니가, 라고 토라진 듯 중얼거리는 할머니 앞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자 약속도 아닌 약속을 해버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오제의 어머니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머리를 내밀더니 할머니, 우리 이제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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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eBook]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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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여자들이 제 흥에 겨워 우리를 껴안곤 했다. 더운 숨결이 목에 와 닿을 때면 고추가 단단해졌다. 날마다 남자를 겪는 여자들의 손길에는 분명 특별한 에너지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숨조차 쉴 수 없도록 품 안 깊숙이 나를 안아주는 자세를 좋아한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세상 그 누구도 여섯 살의 내가 경험한 원초적 흥분을 재현해줄 수 없다는 것을.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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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9월
 
[eBook]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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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취하면 무턱대고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나를 나무란 P형의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P형이 내게 건넨 최초의 농담이었는지 모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자신도 나의 대책 없이 충동적인 술버릇을 알고 있다는 암시적인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 말을 할 때 P형의 입가에 잡힌 주름은 비웃음이 아니라 장난기였는지 모른다. 내가 골목 모퉁이에 숨어서 지켜보았을 때 P형은 소주 한 병이 아니라 꽤 큰 봉지를 들고 숨차게 언덕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봉지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당시에 내가 좋아하던 짭짤한 포와 달콤한 과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을까. P형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은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나는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뿐인, 따지고 보면 현수와 동갑인 스물한 살의 청년에게 무조건적인 신뢰와 절대적인 관용을 기대했던가. 그때는 상상조차 못 했지만 어쩌면 P형은 내가 자고 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이 사실이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어딘가 삐딱하다는 현수의 말은 정확했다. 바람 부는 날의 빗줄기처럼, 틀린 글자를 지우는 교정선처럼, 어떤 비스듬한 바이어스가 P형의 삶을 긋고 지나갔고 나는 그 빗금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다 제풀에 떨어져나온 것뿐이었다. 차라리 술 취해서 아무에게나 사랑을 고백하는 버릇을 가졌던 게 나았다. 현수의 말대로 차라리 음흉한 쪽인 게 나았다. 기억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아둔하고 자존감만 높았던 나는, 나만 모르는 장소에서 나만 모르는 얼마나 많은 수치스런 행위와 제멋대로의 오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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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9월
 
[eBook] 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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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난 술을 마시는 게 좋았다.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이 모호해졌고 고통을 덜 느꼈고, 그래서 쉽게 웃을 수 있었다.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던 것도 농담처럼 우스워졌다. 물론 적당히 취했을 때이 이야기다. 그리고 난 언제나 지나치게 취했다. 처음엔 단순한 습관이었다. 아니 그냥 술이 있어서 마셨다. 문제는 마시면 마실수록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계속 마시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속에 난 작은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맨홀과 비슷했다. 사람 한둘 정도가 빠질 수 있는 크기의, 검고 조용하며 들여다보면 악취가 나는 그런 구멍 말이다. 그런데 그건 내가 취했을 때에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바보같이 매번 놀랐다. 이런 게 여기에 있었다니! 왜 그 동안 보지 못한 거지? 나는 그걸 메우고 싶었다. 아니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마시면 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계속 술을 마셨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게다가 구멍은 그대로였다. 난 계속 술을 마셨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심지어 구멍이 더 커져 있었다. 그때쯤 술을 마시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돌이킬 수 없이 취해 있었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그게 날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이 또렷함을 지워달라, 제발 나를 취하게 해달라, 잠깐이라도 잊게 해달라. 그러나 술은 더이상 나를 돕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언제나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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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