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중학생이던 1983년, 일요일 아침마다 MBC에서 <천년여왕>이라는 일본 만화영화 시리즈를 방영했다. 그 만화 영화는 1999년 9월 9일 9시 9분 9초에 1000년을 주기로 한 유성이 지구와 충돌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1999년이면 우리가 서른 살이 되는 해이니, 그 정도면 인생을 다 산것인데 지구가 멸망한들 뭐가 아쉬울까? <천년여왕>에서 말한 종말의 시간인 1999년을 넘기고 보니, 결코 인생이 쉽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서른이 되면서 뜨겁고 환하던 낮의 인생은 끝이 난 듯한 기분은 들었다. 그다음에는 어둡고 서늘한, 말하자면 밤의 인생이 시작됐다.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전과 서른 이후는 너무도 다른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낮의 인생과 밤의 인생,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이라는 걸 한다. 그중에서 누군가와는 영영 이별하고, 또 누군가와는 평생 같이 살기도 한다. 그러는동안 우리가 연애담을 늘어놓던 카페의 구석 자리는 우리 다음에 태어난 여자들의 차지가 됐고, 대신에 우리는 깊은 밤, 전화를 붙들고 앉아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들어댔다.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대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편에 대해, 뱃살처럼 내 인생에 들러붙은 아이에 대해 우리는 불평을 늘어놓고 또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삼십 대의 중반을 넘기면서 그런 나날들마저도 지나가고 전화벨도 더 이상 울리지 않으면서 하나의 인생이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제야 우리는 깨달았다. 서쪽으로 오렌지 빛 하늘이 잠기는 동시에 반대편에서 역청 빛 물결이 밀려드는 어스름의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그게 종말의 풍경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날마다 하나의 낮이 종말을 고한다. 밤은 그 뒤에도 살아 남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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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4-06-12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