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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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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아홉, 고달픈 입시지옥을 뚫고 대학 문턱에 들어섰다. 지긋지긋한 고딩 딱지를 떼어 버렸다는 안도감, 대학이 별게 아니란 걸 알아버린 좌절감, 강의를 듣는 게 싫었다. 어차피 멍하니 앉아 있을 텐데, 그렇게 쫒기듯 도서관을 찾았다.  

 꽃피는 3월, 학기 초라 도서관은 쓸쓸하리만치 한산했다. 간간히 창틈으로 들려오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을 빼고는 도서관은 거대한 동굴같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손 끝으로 훑으며 여기저기를 다니는 게 좋았다. 그러다 그냥 마음가는대로 책을 꺼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었다. 난 신경숙의 소설을 그렇게 만났다. 3월, 따스함 속의 외로움, 한 줄기 빛같은 위로.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연약한 풀잎같은 시절, 몇 번의 상처를 견뎌내며 내 삶에는 몇 개의 마디만이 세월의 흔적으로 남았다. 스물 아홉, 늦은 나이에 시작한 첫 직장은 나를 현실에 안주하도록 했다. 난 더 이상 인생에 대해, 내 자존심에 대해, 꿈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신경숙이라는 작가는 또 한번 나를 흔들어 깨웠다. 슬픈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열 아홉의 나를 찾아보게 했다. 시간이 정말 더럽게 안간다고, 빨리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중얼댔었는데, 돌아보니 10년을 한 걸음에 뛰어넘은 것 같아 억울하기까지 하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줄여서 ‘어.나.벨’이라 부른다. 이름 참 곱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촛농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앗 뜨거, 하고 아파 소리치다가도 그 따스함에 이내 마음이 누그러지고, 한 방울씩 떨어진 촛농은 켜켜이 쌓여 묵직한 방패가 된다.   


슬픈 청춘들의 노트-윤, 단이, 명서, 미루

  인생에 대한 숱한 의문과 풀리지 않는 고민들, 타오르는 마음을 분출할 데가 없어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그 청춘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청춘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는 영원히 깨지 않을 꿈처럼 암담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빛이 있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청춘은 한 순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절망도, 내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도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그래서 뭔가를 아는 사람들만이 청춘의 뜨거운 한 시절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우리, 오.늘.을. 절.대. 잊.지.말.자.   

  윤은 엄마를 잃었다. 그리고 단이를 잃었다. 명서도 미루를 잃었다. 태어나면 소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했다.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은 한 쌍을 이룬다. 그럼에도 그 조합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윤은 자취방 창문에 검정색 도화지를 붙여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닫아 버린다. 마음 속에 담아둔 말이 너무 많아 낯선 길거리를 배회한다.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리라 믿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과 떨어져 점 하나 찍고 위태롭게 살아가는 윤에게 미루와 명서, 그리고 윤교수는 세상을 향한 하나의 출구였다.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었다. 서로의 아픔을 들여다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알았다. 괜.찮.아.나.을.꺼.야, 쓰다듬어 주다보면, 결국 그 손이 쓰다듬은 것이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아픔의 시작이었다. 청춘의 열병이 한 순간이라는 말은 절망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도 가져가 버렸다. 윤과 명서는 서로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루와 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경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 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네 명의 청춘들, 윤, 단이, 명서, 그리고 미루. 사회는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할 대학생들을 거리의 시위현장으로 내몰았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그들에게 미래를 말해주지 않았다. 시대의 ‘크리스토프’가 된 그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겹게 투쟁했던 그들의 삶이 새삼 슬퍼진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 36.5도에 대한 갈망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게.


  그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는다. 윤은 단이의 죽음을 알고도 단이에게 편지를 쓰고, 몇 시간이고 낯선 거리를 배회한다. 그 거리 어딘가에서 명서 역시 누군가를 찾아 헤맨 듯하다. 새벽 무렵, 술에 취한 명서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가보면 명서가 길바닥에 힘없이 쓰러져있었다.  

  그들이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이는 윤에게, 미루는 명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진 그들은 꽁꽁 숨겨 두었던 마음속 상처를 나눠 갖고 있는 서로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대의 아픔을 쓰다듬는 일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살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떨어져 나간 살점을 찾아 헤매는 일은 낯설지가 않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 같다.  

모르는 사람 백 명을 안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세상을 향한 분노가, 누그러질 수 있을까? 훗날 명서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포옹의 순간들을 사진에 담는다. 36.5도의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지는 순간에는 미움이나 절망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따뜻함, 살아있다는 느낌, 네가 있으니 나도 여기 있다는 존재감, 그들이 찾아 헤맨 것은 결국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청춘, 아름다운 ‘크리스토프’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윤교수는 첫 날 강의에서 ‘크리스토프’이야기를 꺼낸다.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이로 분한 예수를 업고 험난한 강을 건넜다는 성자, 크리스토프. 윤교수는 이제 막 피어난 젊은 영혼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크리스토프인가?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인가?”

  삶은 고통이다. 혼란스러운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내 몸에 달라붙은 짐들을 덜어내고 싶다. 훌훌 털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다. 그렇게 하면 조금 가벼워질까?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새 시간은 저만치 흘러 있다.  

  한창 푸른 청춘의 계절에는 모른다. 뜨겁도록 눈부신 여름이 지나고 무르익어가는 가을쯤 되면 어렴풋이 알 수 있겠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아픔도, 어딘가에 토해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열기도, 어느 순간 소멸해버린다는 사실. 그리고 내 뒤에는 조용히 나를 따르고 있는 발자국이 보인다. 한 발 한 발 꾹꾹, 고통의 무게를 견뎌낸 만큼의 선명함을 새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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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 Incep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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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달콤한 꿈을 꾼 적이 있었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뤄졌지. 그런데 갑자기 눈이 떠진 거야. 아, 이게 다 꿈이었구나. 나도 모르게 막 짜증이 났어. 눈을 감으면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을 있었지만, 그럴수록 의식은 점점 더 또렷해졌어.
 
만약 꿈 속으로 언제든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난 꿈 속 여행을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아. 꿈에서는 현실에서의 아픔을 잊을 수 있으니까.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마음껏 부를 수 있으니까. 꿈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현실 도피라고 욕해서는 안돼. 그들에게 꿈은 현실보다 훨씬 의미있는 공간일지도 몰라.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와 친구들은 다른 사람의 무의식에 들어가 생각을 조종해. 정치적인 혹은 사업적인 의도로 이용돼지. 무의식 세계에서도 현실 세계처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 그래서 대상자는 자신이 깨어있고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믿게 돼.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함께 있어. 의식을 억눌러왔던 존재들, 때론 나를 공격해오던 존재들,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존재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활보하고 다니지.
 
코브는 그 무의식 속에서 또 하나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꿈을 꾸는 자의 꿈 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거지. 굉장히 복잡한 꿈 속 미로를 설계하는 거야. 대상자의 무의식적 방어 존재들이 따라 올수 없을 만큼 견고한. 그렇게 무의식 저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중요한 '그것'을 심어놓는 거지. 생각을 바꾸는 거야. 자신이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불현듯 찾아온 생각인 것처럼. 그걸 '인셉션'이라 해, 이 영화 제목. 
 
'다른 사람의 무의식에 들어가 생각을 심다' 위험한 발상이지만, 굉장히 매혹적인 일이야. 근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어. 꿈 속 여행을 한번 맛 본 사람이라면 그 유혹을 쉽게 부리칠 수 없다는 거지. 꿈 속에서는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고, 어릴 적 추억이 훼손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으니까. 어느새 현실보다 꿈을 갈망하게 돼. 꿈이 현실보다 더 의미있는 공간이 되는 순간, 무의식 속에 갇혀 버려.
 
꿈? 현실? 공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 지각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정신이상자'라고 하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근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뭘까?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어떤 무의식 저편에 그들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현실 지각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다른 현실에서 사는' 사람일지 몰라.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코브는 그 무의식에 맞서서 싸워 이겼을까? 사랑하는 아내가 떠돌고 있는 무의식 저 깊숙한 곳에서 빠져 나왔을까?
 
코브의 토템이 돌다가 쓰러지면 현실을 입증하는 것이라던데, 영화에서는 코브의 토템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 토템은 계속 돌고 있지. 코브가 과연 현실로 돌아왔을까? 영화는 관객 스스로 결말을 내라고 말하는 것 같애. 나? 난 코브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쪽. 코브야, 사랑하는 아내를 놓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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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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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신경숙이라는 작가를 참 좋아한다. 언니라기보다는 누이의 느낌이다. 함께 인형놀이를 하면서 깔깔 거리기보다는 남동생의 더러운 코를 소매 춤으로 스윽 문질러 닦아주는 누이 말이다. 신경숙의 소설 속에서 보여 지는 삶은 연약한 듯 보이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다듬어진다. 그 여린 삶의 흔적들을 내 것인 냥 함께 아파하다보면 어느 새 훌쩍 커버린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픈 마음이 예쁘게 여며진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줄여서 ‘어.나.벨’이라 부른다. 이름 참 곱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촛농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앗 뜨거, 하고 아파 소리치다가도 그 따스함에 이내 마음이 누그러진다. 한 방울씩 떨어진 촛농이 켜켜이 쌓여 묵직한 방패가 된다. 마음 속 상처를 들춰내놓고 어느 순간 슬며시 감싸 안아준다.  

 
슬픈 청춘들의 노트-윤, 단이, 명서, 미루

인생에 대한 숱한 의문과 풀리지 않는 고민들, 타오르는 마음을 분출할 데가 없어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그 청춘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청춘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는 영원히 깨지 않을 꿈처럼 암담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빛이 있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청춘은 한 순간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절망도, 내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도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그래서 뭔가를 아는 사람들만이 청춘의 뜨거운 한 시절을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오.늘.을. 절.대. 잊.지.말.자.   

   
  인생은 각기 독자적이고 한 번뿐이다. 모두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고, 사랑하고, 슬픔에 빠지고, 죽음 앞에 가까운 사람을 잃기도 한다.(p.23)  
   

  윤은 엄마를 잃었다. 그리고 단이를 잃었다. 명서도 미루를 잃었다. 태어나면 소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했다.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은 한 쌍을 이룬다. 그럼에도 그 조합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윤은 자취방 창문에 검정색 도화지를 붙이듯,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닫아 버렸다. 마음속에 담아둔 말이 너무 많아 낯선 길거리를 배회한다.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리라 믿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과 떨어져 점 하나 찍고 위태롭게 살아가는 윤에게 미루와 명서, 그리고 윤교수는 세상을 향한 하나의 출구였다.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서로의 아픔을 들여다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알았다. 괜.찮.아.나.을.꺼.야, 쓰다듬어 주다보면, 결국 그 손이 쓰다듬은 것이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아픔의 시작이었다. 청춘의 열병이 한 순간이라는 말은 절망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도 가져가 버렸다. 윤과 명서는 서로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루와 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경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 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네 명의 청춘들, 윤, 단이, 명서, 그리고 미루. 사회는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할 대학생들을 거리의 시위현장으로 내몰았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그들에게 미래를 말해주지 않았다. 시대의 ‘크리스토프’가 된 그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겹게 투쟁했던 그들의 삶이 새삼 슬퍼진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 36.5도에 대한 갈망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게.


  그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는다. 윤은 단이의 죽음을 알고도 단이에게 편지를 쓰고, 몇 시간이고 낯선 거리를 배회한다. 그 거리 어딘가에서 명서 역시 누군가를 찾아 헤맨 듯하다. 새벽 무렵, 술에 취한 명서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가보면 명서가 길바닥에 힘없이 쓰러져있었다.
   그들이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이는 윤에게, 미루는 명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진 그들은 꽁꽁 숨겨 두었던 마음속 상처를 나눠 갖고 있는 서로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대의 아픔을 쓰다듬는 일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살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떨어져 나간 살점을 찾아 헤매는 일은 낯설지가 않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 같다. 
   모르는 사람 백 명을 안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세상을 향한 분노가, 누그러질 수 있을까? 훗날 명서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포옹의 순간들을 사진에 담는다. 36.5도의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지는 순간에는 미움이나 절망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따뜻함, 살아있다는 느낌, 네가 있으니 나도 여기 있다는 존재감, 그들이 찾아 헤맨 것은 결국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청춘, 아름다운 ‘크리스토프’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윤교수는 첫 날 강의에서 ‘크리스토프’이야기를 꺼낸다.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이로 분한 예수를 업고 험난한 강을 건넜다는 성자, 크리스토프. 윤교수는 이제 막 피어난 젊은 영혼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크리스토프인가?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인가?”

  삶은 고통이다. 혼란스러운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내 몸에 달라붙은 짐들을 덜어내고 싶다. 훌훌 털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다. 그렇게 하면 조금 가벼워질까?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새 시간은 저만치 흘러 있다. 
  한창 푸른 청춘의 계절에는 모른다. 뜨겁도록 눈부신 여름이 지나고 무르익어가는 가을쯤 되면 어렴풋이 알 수 있겠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아픔도, 어딘가에 토해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열기도, 어느 순간 소멸해버린다는 사실. 그리고 내 뒤에는 조용히 나를 따르고 있는 발자국이 보인다. 한 발 한 발 꾹꾹, 고통의 무게를 견뎌낸 만큼의 선명함을 새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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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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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 ‘마음’은 제목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를 관찰한다. 화려한 수식은 없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전달한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 속에서 주인공의 관점 변화나 세상에 대한 모순된 태도는 그 자체로 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남겨둔다.  

- 대비되는 심리 구도 : 선생님과 나 

   이 글은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선생님과 유서’의 세 부분으로 전개된다. ‘선생님과 나’와 ‘부모님과 나’는 아직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순수한 대학생 ‘나’의 관점에서 보여지며, 마지막 부분 ‘선생님과 유서’는 유서에 담긴 ‘선생님’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간다. 심리를 드러내는 화자를 주인공으로 보자면, 이 글의 주인공은 ‘나’와 ‘선생님’ 이렇게 두 명이 되는 셈이다. 

  주인공인 ‘나’와 ‘선생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를 이룬다. ‘나’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대학생이다. 인생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며, 취업 문제나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도 비교적 의연하게 대처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나’는 인간에 대한 막연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지식인을 ‘선생님’이라 깍듯이 존칭하며, 관심과 친밀함을 전하려 애쓴다. 반면 ‘선생님’은 아집과 삶에 대한 번민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이었던 ‘선생님’은 젊은 날에는 누구 못지 않게 학문에 열정을 불태웠지만, 세상의 욕망과 마주하면서부터 스스로 섬이 되어 하루하루를 외롭게 살아간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인 ‘나’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이끌린다. ‘선생님’은 간혹 형식적이고 차가운 말투로 ‘나’의 접근을 피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자신의 말하기 힘든 과거를 ‘나’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인간과의 마지막 소통을 시도한다. ‘선생님’의 과거가 담긴 유서를 받고 나서 ‘나’의 행동은 어떻게 변했을까? 소설은 이 부분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친구를 배반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얻었지만, 친구의 자살로 인해 평생을 죄책감과 고뇌로 보내야 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바라볼까? 학문적인 스승으로, 또 인생의 선배로 ‘선생님’을 동경했던 ‘나’의 시선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주인공인 ‘나’가 선생님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죽기 전에 꼭 말해두고자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 인간적인 고뇌, 껍질과 욕망의 충돌  

  이 소설을 읽고, 정확하게는 ‘선생님과 유서’부분을 읽고, 난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새삼 궁금했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한 여자를 두고 절친한 두 친구가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 사실을 한 친구만 알고 있는 거다. 여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털어 놓는 친구를 보며 심각한 갈등에 빠지겠지. 이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고뇌다. 왜냐하면, 이러한 갈등은 ‘껍질’과 ‘욕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껍질이란, 인간 관계 속에서 쌓아왔던 신뢰를 말한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데로 하고 싶은 마음, 즉 ‘욕망’을 이 두터운 껍질이 막고 있기 때문에 고민이 시작된다.  껍질을 벗어 우정을 깨뜨리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우정으로 포장된 신뢰의 껍질 속에 묻어둘 것인가. 

    인간관계의 또 하나의 문제는 ‘외로움’이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외롭다고 느낀다. 사람들과 말을 하고 연을 맺으면서 그 외로움은 잊혀진다. 그리고 서로간의 관계가 돈독해졌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의지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나’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나’와 세상과의 소통이 된다. 핸드폰을 잃어버리거나 인터넷이 끊겼을 때,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쓰듯이 말이다. 세상을 향한 끈은 항상 사람을 통한다. 그래서.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은 세상에서 내쳐진 기분을 안겨준다. 외로워서 세상에 나갔지만, 세상에게 뺨을 맞으니, 이번에는 아예 돌아누워 버린다. 더 많이 외로워지고 살아갈 힘이 없어진다. 선생님의 친구가 자살하게 된 것 역시, 이런 마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구성과 단조로운 말투로 쓰여 조금은 심심한 듯한 느낌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극 중 누구에게도 연민을 갖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쉽게 읽어나갔지만, 읽고 난 후에는 참 긴 여운이 남는다. 

*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동경 출생. 본명은 긴노스케. 동경대학 영문과 교수를 거쳐 1907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면서 전업작가로 활동. 대표작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배개' '산시로' '그 후' 등이 있음.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자 국민작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1천엔 짜리 지폐의 모델활동도 함(아래 왼쪽은 소설 '마음'의 표지그림, 오른쪽은 나쓰메 소세키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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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여행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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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요?

   문득,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낯선 사람들, 익숙하지 않은 거리 냄새,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를 불안감과 긴장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로 여행을 가까이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이유로 여행을 멀리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메이컨은 여행안내서를 집필하는 일을 하지만, 후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행을 싫어 하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그 일을 받아들이지요. 그 만의 방식으로요.   
 

   
 

 -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피하려면 항상 책을 소지할 것. 잡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집에서 가져온 신문은 향수병을 일으키고, 다른 지방의 신문은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 양복은 중간 회색이어야 한다. 회색은 때가 잘 타지 않을 뿐 아니라, 갑작스럽게 장례식이나 격식 갖춘 행사에 참석할 때 적당하다. 동시에 일상복으로 입기에도 무겁지 않다.

 
   


     메이컨이 쓰는 것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이것은 낯선 곳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들에게 여행은 일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일 뿐이지요.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곳, 그래서 뭔가가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구하거나 찾아 헤매야 하는 곳, 벗도 가족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곳. 그래서 메이컨은 최대한 자신의 방식을 무너뜨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 헤맵니다. 바가지 요금과 불친절한 서비스에 후회하지 않도록, 무심코 먹은 서비스 음식에 배탈이 나지 않도록, 그리고 실수 없이 최단 거리로 여행지를 둘러볼 수 있도록요.  
 
- 인생을 위한 안내서가 있다면?
   
   그는 우연히 겪을 지도 모를 불편함에 대비합니다. 그게 그의 방식이니까요.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일들에 당황해서 비틀거릴 까봐 우리는 전전긍긍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 두려워하고, 익숙한 습관과 믿음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사람의 성공담이 인생의 틀인 것처럼 그대로 보고 배우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생이, 정말 그렇게 예정된 대로 돌아갔나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할까요? 안내서 따위에는 나오지도 않을, 그 어떤 유명인도 처세술에도 써놓지 않은 그런 일이 닥치면요. 가령, 캠프를 간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강도의 총에 맞아 죽어서 돌아온다면요.

   그 남자, 메이컨과 아내 세라는 어느 날 갑자기, 이 엄청난 일을 맞닿게 됩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요. 하지만, 메이컨은 이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도 자신을 사람들 앞에 노출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큰소리를 내어 울거나 돌아오게 해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지요. 대신 그는 이던의 물건을 하루빨리 처분하고, 아이가 없어서 좋은 점들을 생각했습니다. 세라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냉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메이컨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자신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안락함을 깨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는 그렇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세라에게 남편 메이컨의 이런 태도는 충격적이었고, 그녀는 결국 이혼을 요구합니다.   


- 우리는 험한 세상을 여행하는 우연한 여행자   

   아내와의 별거는 메이컨에게 혼란을 주었지요. 손톱 끝까지 박혀있는 엄중한 일상의 질서가 깨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메이컨에게 어느 날 뮤리엘이라는 여자가 찾아옵니다. ‘기타등등’을 ‘키타등등’으로 말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엉뚱하고 유쾌한 뮤리엘은 메이컨에게 자신의 일상을 들이밉니다. 전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안쓰러울 정도로 약해 보이는 아들 알렉산더와 남의 일에 참견 잘하고 어수선한 그녀의 가족과 이웃들. 메이컨은 뮤리엘의 일상에 들어가 그의 삶과는 전혀 닮지 않은 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자신을 보게 됩니다. 

   메이컨은 처음부터 선뜻 그녀를 받아들일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뮤리엘을 끼워주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요. 계획없이 되는대로 사는 그녀를 받아 들이려면 메이컨 자신의 질서정연한 일상이 흐트러질 테니까요. 하지만, 메이컨은 결국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편한 선택을 합니다. 그는 세라가 아닌, 뮤리엘을 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는 자신의 보금자리라고 믿어왔던 그곳을 벗어나면서까지, 삶이 불편해질지 모르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는 세라를 떠나면서 말합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약을 먹고 몽롱하게 버티느니, 불편함을 견디면서 일상에 깨어있고 싶다고. 

  메이컨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보고 싶었을 겁니다. 인생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정해진 길대로만 가면 재미도 없고요. 느닷없는 사건에 당황하고 비틀거리지만, 그런게 우리 인생의 길을 더욱 풍성하게 하리란걸 아니까요. 인생이 옳고 그름을 구분해야하는, 정해진 규칙과 예정된 시간표가 있는 것이었다면, 정말 심심했을꺼예요. 낯선 타국을 여행하듯이, 가끔 잘못된 길에 들어 쩔쩔매다가도 어느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노다지'를 발견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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