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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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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끌렸던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감. '불안(The Anxiety)'을 보면서 철학, 예술, 역사를 넘나드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을 보았고, '우리는 사랑했을까?(Essays in Love)'를 보면서 남자와 여자라는 오묘한 관계, 사랑에 대해 나름대로 철학적인 결론을 내리려 안간힘을 썼더랬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라면,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길 수 없는 뭔가 깊이 있는 위트가 묻어 있지 않을까?' 내겐 그런 기대가 있었다.  

   또 하나는 '공항'이라는 공간이 주는 정서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공항의 '이용객'보다는 '방문객'이었던 적이 더 많지만, 공항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은 곳이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공항을 배경으로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렸던 그 장면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공항은 처음과 마지막이 만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아쉽고, 그래서 설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공항'이 주는 그런 낭만적인 그림을 꿈꾼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저자는 다분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공항을 바라본다. 감정의 동요를 이끌어낼 만큼 서정적이거나 아기자기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내가 기대한 바를 그대로 충족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기대를 깼기 때문에 흥미로웠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항을 소유한 회사의 의뢰로 히드로 공항에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백작들의 돈을 받아 책을 썼던 예를 들먹이며, 상업과 예술의 만남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박할 필요는 없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다. 일단 이 글은 '공항'이라는 공간의 정서에 이끌린 한 작가의 순수하고 독보적인 작업이 아니다. 유명 작가의 문학적인 소양을 빌어, 히드로와 같은 세계적으로 큰 공항을 대중에게 설득력있게 알리고 싶은 치밀한 마케팅 전략이 숨어있다. 

  그렇더라도 책의 내용이 공항 안내 책자처럼 뻔뻔하지는 않다. 저자는 공항에서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최첨단 건축설비와 공항 직원들의 서비스, 여행객들의 일화적인 기록을 다룬다. 표를 끊는 모습, 보안대에서 검열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 상점을 다니며 쇼핑을 하고, 남는 시간에 휴식을 즐기는 모습까지, 공항 안에서 늘상 대하는 익숙한 모습에 대해 하나 하나 관찰하듯이 다가가고 있다. 이런 광경들은 공항을 한번이라도 드나들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 적이 있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공항은 우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공간이다. 비행기라는 이동 수단을 타기 위해 거쳐 가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공항에서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한 기록이 굉장히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찰자적 시각이라는 점과  배추 속 넣듯이 매 페이지마다 곁들여 있는 사진은 상업과 예술의 경계에 있는 '인디 잡지(Independent Magazine)'를 보는 것 같다. 사진에서 풍기는 화보적인 느낌은 사적이고 정서적이라기 보다는 기획적이고 의도적이다. 고용주가 작가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지만, 사진작가는 분명 회사와 연관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어떤 사진도 없이 글로만 되어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 이미지가 주는 자극이 글에서 오는 상상력을 방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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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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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바닷가 마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해가 뜨면 반짝이며 일렁이는 바다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노을이 어스름하게 질 때면 바닷가 근처 바에 앉아 맥주 한 잔으로 고된 일상을 마무리 한다.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조용하고 순조롭게 흘러간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 때로 거센 바람으로 숨 가쁘게 일렁이는 바다처럼.
   여기, 밀려드는 파도 앞에 놓인 한 여자가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그녀는 누구보다도 인생을 호탕하고 자신만만하게 사는 여자다. 이 책은 올리브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겪게 되는 변화를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 보여준다. 서로 다른 열 세 개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묶어 호흡을 따라가기가 수월치만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주인공들의 각기 다른 삶 속에는 교묘하게 맞물리는 무언가가 있다.
   올리브는 거구의 체격인데다 내키는 대로 감정을 표현한다. 화가 나면 욕을 하고 짜증을 내다가도,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 버린다. 그런 변덕스러운 올리브를 남편 헨리는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헨리는 천성이 친절하고 다정한, 모범적인 남편이다.
   헨리는 여직원 데이즈와 함께 약국을 꾸려간다. 순하고 여린 데이즈가 남편을 잃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헨리는 데이즈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브는 그런 헨리를 보며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데이즈의 고양이가 죽던 날, 허겁지겁 달려 나가던 헨리에게 빈정거리듯이 내뱉은 말 속에는 올리브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오랜 세월 굳게 믿어왔던 생각들이 헤집어 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서로의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상처가 각자의 인생 안에서 고군분투하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올리브는 다소 거칠고 괴팍한 성격이었지만, 아들과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해 왔다고 믿었다. 나중에 며느리가 생기면 집 앞 마당에 튤립 구군을 심는 법을 가르쳐주리라 꿈꿨었다. 그런데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우울증이 생긴 것도, 결혼해서 부모를 등지고 머나먼 곳으로 이사를 간 것도 다 자기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브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현기증을 느낀다. 너무나 잘 안다고 느꼈던 익숙한 인생의 조각들이 어린애 발장난처럼 일순간에 헝클어져 버린 느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이 독하고 강하게만 보이던 올리브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조바심을 냈었는지 모른다. 올리브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우울증을 앓다 어느 날 갑자기, 쪽지 한 장 남겨 놓지 않고 자살을 한다. 아버지의 죽음, 미망인이 된 어머니의 슬픔, 이 모든 것들이 어린 올리브에게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올리브는 남편과 아들도 느닷없이 자신을 떠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신의 사랑을 다소 거칠고 투정부리듯이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올리브의 이런 상처는 옛 제자 케빈을 통해 보여 진다. 케빈은 어렸을 때 우울증으로 자살한 엄마의 죽음을 지켜봤다. 동생은 마약중독에 빠져 있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는 정신발작으로 자해를 한다. 케빈은 생에 대한 의지를 잃었고,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희망이 마음에서 움트게 되면 더 많이 실망하고 상처 받으니까.
   케빈은 물에 빠지기 전에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인생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회상했다. 올리브는 그런 케빈에게 다가간다. 그리 다정한 성격이 아닌지라 조곤조곤 타이르지는 못한다. 그저 코끼리 같은 몸집으로 케빈의 비좁은 차안에 불편을 감수하고 앉아있을 뿐. 그 사실만으로도 올리브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고, 그래도 난 이렇게 살지 않느냐고, 앞날이 창창한 네가 살지 못할 이유가 뭐냐고.
   삶은 때로 가혹하고 때로 애처롭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을에서 식료품점을 하던 보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다. 남편과 함께 할 여행을 꿈꾸며 여행책자를 모아 둔 바구니를 쳐다볼 수조차 없다. 보니는 올리브에게 여행바구니를 대신 치워달라고 부탁한다.
   여행바구니는 버려졌지만, 행복을 꿈꾸던 순수한 마음까지 묻혀버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들만의‘여행바구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쓰지만 뱉을 수 없는 약처럼, 고통스럽지만 한없이 아름답다.
   올리브 역시 남편 헨리와 함께 크리스마스 장식을 의논하고, 장차 태어날 손자들이 뛰어놀 정원을 가꾸려 튤립 구군을 사오던 나날들이 있었다.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아무런 감정변화도 없이 침대에만 누워있게 되었을 때, 올리브의 여행바구니도 거기서 멈췄다.
   헨리가 세상을 떠나고 올리브는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상실감을 느낀다. 남아도는 시간에 자원 봉사도 하고, 마을 모임에도 나가고, 때때로 단골 도넛가게에 들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허전했다. 올리브는 점점 정오의 따사로운 햇볕이 부담스러워졌다. 세상이 뭔가 활기찬 기운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어스름한 해질녘 혹은 어두컴컴한 밤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시절의 그녀였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뚱뚱하고 고집 센 잭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잭은 한없이 약해져 있었고 올리브를 필요로 했다. 올리브를 바라보는 잭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여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올리브는 세상에 아직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늙고 주름진 몸뚱이에 생에 대한 열정이 피어났을 때, 올리브는 깨달았다. 좀 더 젊었을 때 인생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착한 남편과 아들에게 온 마음을 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 줄만 알았었다. 그렇게 오만을 떨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해지고, 뱃살은 축 쳐져 울퉁불퉁 보기 싫게 변한다. 늙어 버린 몸뚱이보다 더 서러운 일은 이제‘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는 거다. 사회는 구닥다리 일꾼을 원하지 않고, 품안에 있던 자식은 어느 새 훌쩍 자라 부모를 떠나버린다. 나이를 먹는 것은 빈 둥지에 홀로 남은 어미 새처럼 마음이 공허해지는 일이기도 한다.
   하지만 비워진 다음에야 채워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 주변의 것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그제야 자신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게 되니 말이다. 해는 저물고 있지만, 바다는 노을빛으로 물들어 더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바닷가를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말없이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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