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내가 죽던 날
로렌 올리버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톡톡 튀지만 진심이 느껴진다. 결말부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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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는 보장! 게다가 감동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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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 오케이
다이라 아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좋은 친구와 술자리를 하면서 우리의 골치를 썩게 하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중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가족. 나이드신 부모님의 나날이 쇠해가는 모습, 내가 선택해 만든 가족인 남편과의 트러블.... 평범한 우리에게도 가족은 한 권의 책이다. 비록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해도, 당사자에게는 한없이 절절한 것이다.

뜬금없고 좀 청승맞기까지 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대견하다'고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전쟁 같은 삶 속에서 어떻게든 제 자리를 만들어내면서 모두들 살아가고 있다. 매일 달콤한 잠자리를 애써 떨쳐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고,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두 권의 책의 영향이 컸다. 그 하나는 릴리 프랭키의 <도쿄 타워>였고, 다른 한 가지가 이 <만사 오케이>. 둘 다 재기발랄한 일본소설이면서, 가족을 주제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사 오케이>는 처음으로 읽는 다이라 아스코의 소설이다. 능청스러운가 하면 뱃속에 구렁이 열댓마리 감춘 것처럼 은근하기도 한 필력이 인상적이어서 검색해 보니, 쉰을 넘은 나이 지긋한(?) 작가였다. 그렇게 다양한 세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비밀을 조금은 알게 된 기분. 소녀처럼 발칙하고 소년처럼 기개가 넘치지만, 세상사 달관한 아주머니의 넉넉함으로 인물들을 아우르는 것이다.

주인공 가타오카 가족은 책 표지에 나온대로 '콩가루 가족'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철저히 각개전투로 끊임없이 일을 친다. 뉘우칠 줄 모른다. 학습 효과, 교훈 따위의 따분한 표현은 이 가족이 보고 자란 사전에서는 애초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다.

생각해 보면 매일의 모든 행동이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 위해 하는 것들 뿐이다. 지각을 해서는 안돼.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회사에 가서는 안 돼.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몇 시간이나 떠들어서는 안 돼. '너무 사랑해서도' 안돼. 보답받을 수 없는 애정을 퍼붓는 것도 안돼. 어쩌면 단지 우리의 행동을 규정짓는 것은 왜소한 공포심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인간 속의 밝음 뿐 아니라 어둠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존재를 직시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끝까지 이 책을 낄낄대며 읽을 수 있는 이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상쾌할 수 있는 이유는 섣부른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단죄하고 옥죄는 수많은 평가의 시선, 시선들. 우리가 도망가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행복한 가족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 다이라 아스코는 '행복한 개인'을 탐구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통찰이자 발상의 전환이다. 우선 행복한 나와 너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복'도 없다.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모두가 각자 다르다. 그것을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가족의 행복이란 것도 TV 광고 속에나 나오는 허상일 뿐일 게다. 자, 그러니 가족 소설도 이젠 쿨해질 때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다이라 아스코란 작가는 영리한 선각자임에 분명하다.

한 가족-아버지대, 딸대, 손녀대에 이르는 방대한 한 가족-에 대한 두터운 일대기를 숨돌릴 틈 없이 읽어낸 후에는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아닌 발칙한 용기가 마음 속 가득 파고든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이다. 평범하지만 대견한 우리에게도. 그러니 하단전에 힘 빡주고, 만사 오케이!

 

종업원은 손님에게 하찮게 여겨지고, 손님은 손님대로 쓸모없는 놈이다 식충이다 하며 회사 사장에게 하찮게 여겨지고, 또 그 사장은 젊은 여사원에게 역겹다며 하찮게 여겨진다. 결국 모두가 서로를 하찮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면 좋지 않은가. 일일이 눈 꼬리를 치켜뜨는 건 쓸데없는 짓.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편해졌다. p245

시간은 무표정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우연’이라는 것은 두 번 다시없는 보물상자다. 그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열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열지 않고 지나치는 방법도 있지만, 다카코는 일단 주운 지갑 안은 살펴보는 성격이다. 그리고 좋은 것이 있다면 취한다. p269

아아, 나도 가족도 나름대로 잘하고 있어. 남편의 일은 남편에게, 아이들의 일은 아이들에게 맡기고, 좋을 대로 하고 있으니 여한은 없어. 내 일은 내게 맡겨.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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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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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그로테스크>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성공을 목표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조직해 왔던 가즈에가 추락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막연하다. 막연한 것은 좋은 화법이 되지 못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장면이었다.

“미인은 성격이 나빠도 미인이니까 괜찮다는 말을 듣지만, 추녀는 성격이 좋아도 그래봤자 호박이란 소리를 듣잖아.” 이런 대사가 나온 건 어떤 만화였더라? 그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던 터라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시 일본 만화였다. 일본이란 곳은 어떤 사회이길래 도대체가 그따위일까. 모르긴 해도 우리 사회와 무척 흡사할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못생긴 가즈에 역시 그랬다. '여자의 매력'이라는 모호하지만 절대적인 아우라를 획득하려 몸부림치는 가즈에가 택한 수단은, 밤거리에서 매춘을 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자의 매력이란,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정작 그 주체에게는 가학적인 것이었다. 발에 물집을 만드는 하이힐, 허리를 옥죄는 코르셋, 얼굴이나 다리의 잔털을 다듬는 철저히 비생산적인 노동같은 것들.

그렇게 시작한 '밤일'은 결국 가즈에의 낮을 잠식한다. 괴물과의 하룻밤을 애호하는 남자들을 찾아 필사적으로 거리를 헤매는 밤이 지나가고, 출근한 그녀는 회의실 책상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한다. '못볼 것을 본' 자들 특유의 혐오감과 두려움을 얼굴에 담은 사람들은 가즈에를 철저히 배척한다.

생각해 보면 가즈에가 진짜 괴물이 된 것은, 매춘을 시작하던 시점부터가 아니라 회의실의 딱딱한 탁자 위에 등을 누인 그 때부터다. 이 사건은 그녀가 이미 저지른 과거의 과오의 확대 버전이기도 하다. 십대의 가즈에는 분수에 맞지 않는 귀족 학교에 입학했고(literally 그래서 인생 조졌다), 얌전히 눈에 띄지 않는 모범생이 되어 학교를 졸업하는 길을 선택할 만큼 현명하고 비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흉내 내어 흰 양말에 랄프 로렌의 말 그림을 손수 수놓았다. 그것이 다른 아이들의 비웃음을 사는 장면의 참혹함은 알아서 상상하시길.

손가락질을 당하면 끝장이다. 밤길을 다니면 강간을 당하게 된다. 전철역에서 '화장붓을 주겠다'는 친절한 권유에 순진하게 이끌려가고, 주소를 적어주거나 하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물건을 사게 만든다(이것은 역시 기리노 나쓰오가 쓴 장편 <리얼 월드>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어디까지가 내 것이고, 어떤 것을 탐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명시되어 있는 경전은 없다. 단지 우리의 행동을 규정짓는 것은 왜소한 공포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매일의 모든 행동이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 위해 하는 것들 뿐이다. 지각을 해서는 안돼.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회사에 가서는 안 돼.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몇 시간이나 떠들어서는 안 돼. '너무 사랑해서도' 안돼. 보답받을 수 없는 애정을 퍼붓는 것-예컨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가 히카루 겐지에게 편지를 쓰는 일처럼-것도 안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수룩하게 당하는 것은 분명 내 선택이 만들어 낸 실수고, 세상은 점점 더 그것을 냉엄하게 가르치려 한다. 그런 방향성으로 꾸준히 달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쁜 것은 괴롭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라고. 사람들이 죄와 죄가 아닌 것을, 나아가서는 단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세상은 지옥도와 다르지 않다.

인간 속의 어둠을 그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존재를 직시하기란 힘든 일이다. 때문에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는 마츠코를 미워했다. 가즈에를 미워했듯이. 그러나, 하느님 감사하게도 내가 운이 좋아 앞으로 평탄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해도, 그들에게 타이를 말은 없다. 기껏해야 "너 자신을 지켜."라는 무책임한 대사를 되풀이하게 되지 않을까. 얄팍한 우월감과 더 얄팍한 자괴감으로. 왜?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어떻게? 글쎄, 나처럼?
 
그러므로 내 가장 가까운 곳에 마츠코, 그리고 가즈에가 있다고 해도, 결국 흐지부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고 말리라. 오, 단지 당신들보다 훨씬 더 겁이 많았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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