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은 이래서 죽지 않는다
존 업다이크 (2000년 6월 20일자 [문화일보])


전문가들은 이미 독서시장에 등장한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의 전자텍스트 출현으로 종이와 풀로 제본한 책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제 책은 휼렛패커드에서 제조한 포켓용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갔다. 이미 편지나 신문,잡지에 의해 행해지던 의사소통의 상당부분이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터넷상에는 거대한 디지털도서관이 들어섰다. 만일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되어 종이책이 두루마리에 합류하고 사라져버린 양피지사본과 같은 운명이 된다면 나는 우리가 그리워하게 될 것이 몇가지 생길 것이라고 예언한다.

◆가구로서의 책=서가에 가지런히 꽂힌 책은 딱딱한 분위기의 방을 따뜻하게 밝히는 효과가 있다. 또 여기저기 한권씩 흩어져 있는 책들은 형성중에 있는 정신의 과정을 드러낸다. 머리맡이나 거실 안락의자에 놓인 책은 우리에게 빠르고 편안하게 이 세상으로부터 놓여나 또 다른 세상으로 안내할 것을 약속한다.

◆감각적인 기쁨을 선사하는 책=빵상자보다 작고 TV원격조정장치보다 큰 보통크기의 책은 사람 손에 들기 꼭 알맞은 사이즈로 안성맞춤의 유혹적인 감각을 손에 준다.오른손의 작은 손가락 위에 한두 시간 얹혀 있는 책은 불편한 무게감을 선사하지 않으며 엄지손가락으로 한쪽 페이지를 잡고 다른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그 맛이라니. 5세기 반에 걸친 인쇄술의 결과물인 책의 직사각형 모양이 우리에게 안내하는 또 다른 세상에의 항해는 너무도 부드러워 우리가 침잠해 들어가는 상상의 세계와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우리 자신과의 경계선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책의 존재이유에 대한 지난 10년간의 혼란은 서점에 인상적으로 진열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인해 책의 부피를 크게 하고 글자를 부풀려 작은 손가락으로 감당하기 불편하게 만들어버렸다. 디자인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만든 평범한 책이라도 윙윙거리는 전파 소리가 나는 노트북보다 침대 머리맡에서는 더 정겨운 동반자이다.

◆기념품으로서의 책=어떤 사람의 장서목록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상징한다.유년기에 읽은 책들,사춘기의 열망속에서 읽은 책들,대학시절에 읽은 책들,여행하면서 혼자 읽은 책, 집을 옮길 때마다 달라진 책들.나는 지금도 먼지를 쓰고 시골집 서가 한구석에 얹혀 있던 내 어머니의 대학시절 교재들을 기억한다.르네상스 시들과 그리스 희곡들로 이루어진 그 책들은 오랜 세월 좀벌레에 먹히며 내 어머니의 정신의 포만감을 눈부시게 뿜어냈다.
내 대학시절의 책보따리들은 내 젊은 시절 순례길의 여정과 단계,순간들을 상기시키며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이 책들의 구체적 증거가 없다면 내 인생은 허깨비같아질 것이다. 책들은 내 주변에 그대로 빼곡하게 내 머리보다 높이 쌓여 있다. 그들은 내 과거의 연장일뿐만 아니라 내 존재의 근거속으로 안전하게 가라앉아 내 생각의 구름위까지 도달한다. 책은 우리의 뇌세포를 외화시킨 것이며 우리의 집을 생각하는 몸으로 만든다.

◆우리의 빛을 잡아 앉히는 책=책은 우리의 변덕스럽고 뜨기쉬운 본성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전자책은 1년이면 구식이 돼버리고 15년쯤 지나면 80년대 중반 내가 소중하게 사용했던 워드프로세서처럼 폐기처분해야 된다.전자책은 실체가 없이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다. 책이 없다면 우리는 전파속으로 녹아들어가 우리의 인생도 단지 한 세트의 영상 장면으로 화해버릴 것이다.


 

특히 마지막 문단은 가히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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