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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평점 :
고상하고, 섬뜩하고, 또 슬픈 소설. 개인적으로는 폴 오스터와의 첫만남이다. 좋은 구절이 나올때마다 귀퉁이를 접어놨더니 심히 깔끔하지 못한 책이 되어버렸다. 술자리에서도 궁금해 펼쳐드는 바람에 고추장이 묻었다. 나는 확실히 책의 궁정식 연인이 못된다. 하지만 그만큼 <뉴욕 3부작>이 눈을 떼기 힘든 책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수록된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있는 방' 세 편이 서로 의지하면서 얽혀드는데, 제일 잘 짜인 건 '유리의 도시'고 흥미로운 건 '잠겨있는 방'이다. 하지만 중간에 끼어 단단한 이음쇠역할을 해내고 있는 '유령들'이 빠졌다면 섬뜩함은 절반 이하로 줄었을 것이다.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린 세 편 모두에서 반드시 누가 누군가를 쫓는다.
어느 날 날아온 의뢰를 왠지 거부할 수 없어 받아들이는데, 주인공은 누군가를 쫓는 일이 오히려 완전히 대상에게 지배당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벗어나고 싶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지 못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고, 먹고 자고 입는 일상의 생활이 파괴된 후 그는 한쪽을 향해 촉수를 세운 신경만이 살아 번뜩이는 괴물이 된다. 더구나 이제는 감시하는 쪽이 나라는 사실도 확신할 수 없다. 대부분 그는 어느 시점에서 쫓던 대상과 맞닥뜨리는데, 그 만남에는 생사를 견 격투나 통쾌한 승리도 없다. 대상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어쨌든 나는 '졌다'는, 열패감과는 다른 막연한 예감을 느낀다. 때로 그 대상이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확실치는 않다.
<뉴욕 3부작>을 말그대로 읽어치우자마자 오스터의 다른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뉴욕...>이 최고 걸작이라고 평하는 독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맛있는 걸 먼저 먹어버린 죄로 다음 걸 집어드는 손에는 흥이 덜하게 생겼군, 하고 내심 조금 체념하고 있었는데 이어 집어든 <달의 궁전>의 몰입도도 이에 못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와 무덤가에서 벌이는 후반부의 격투 같은 것은 머릿속으로 쑥하고 빨려들어와 직접 경험한 일 만큼이나 명징한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겨우 두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괴물같은 삶의 흉계와 스스로의 의지가 결합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주인공들의 비애와 잘 벼린 신경의 번뜩임이 폴 오스터 특유의 미학이라는 힌트를 얻었다. 순식간에 목까지 빠져드는 늪 안에 발을 디딜까 무서워 조심조심 사리며 살아가는 게 보통 사람의 인생인 만큼, 속도감과 통찰이 함께 살아있는 폴 오스터의 시각을 통한 대리체험은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힘을 증명하는 것은 소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옵션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