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의 목소리 ㅣ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1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시리즈 [어둠의 목소리]와 [미미의 괴담]을 읽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도깨비와 내기하는 혹부리영감틱한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여전히 역치가 한없이 높은 듯한 주인공들이 무표정하고 불길한 얼굴로 등장해 기괴하다못해 역겨운 사건에 휩싸인다.
두 단편집은 예전의 16권에다 토미에 어게인을 합친 호러시리즈에 비해서는 느슨한 편인데(약간은 맥빠진 듯한 [미미...]보다는 [어둠의 목소리]가 보여주는 기개 쪽이 매력있다), [소이치의 즐거운 일기]의 소이치가 자란 것이 분명한 못을 문 남자와 그로테스크한 모델이 등장하는 등 드물게 자기패러디까지 하는 여유가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엄청나게 웃기다. 시각적으로 역겨운 점에 있어서는 여드름의 무서움을 보여준 [글리세리드]가 독보적이지만 이건 영 엽기사이트 같아서 내 취향은 아니고, 광기와 죄책감으로 얼룩진 비교적 얌전한 단편 [속박인]이 추천할 만 함.
개인적으로 꼽는 이토 준지 베스트는 단연 콜렉션의 [사자의 상사병]과 [부유물]이다. 문제를 잊기 위해 계속해서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여자가 온 몸에 문신을 한 장면 같은 건 비주얼 자체의 충격도 그렇지만, 왠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가끔 '그럴리는 없겠지만' 내가 차도로 뛰어들 것 같아 오싹해질 때가 있는데, 이 때 '그럴리는 없겠지만'은 전혀 안전한 어휘가 못된다. 공포에는 여러종류가 있지만 자기 안의 광기를 간지르는 두려움은 낫을 든 살인마와는 달라서, 설령 스스로 철창 안에 갇히고 열쇠를 폐기한다 해도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 광기의 종류가 '피학성'이라는 점에서 나와 이토 준지는 코드가 맞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나름의 엄격한 질서를 갖춘 이토 준지의 만화는 아주 가끔 작정을 하면 어떤 서정적인 시구절보다 아름다워진다. [사자의 상사병] 마지막 장에서 아주 짧게만 등장하는 백의의 미소년의 '그후의 이야기'는 가슴을 저민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천박한 물욕과 감추고 싶은 흉한 비밀들이 만들어낸 엑기스인 [부유물]의 마지막이 사랑고백이라는 점도 못말리게 깜찍하단 말이다.
바따이유는 지갑 안에 늘 100조각으로 찢겨죽는 중국인 죄수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을 담아가지고 다녔다는데, 이 사진의 "눈을 돌리고 싶지만 못박힌 듯 시선을 고정할 수 밖에 없는 매혹"에 대해서도 자주 설파한 적이 있단다. 공포를 즐기는 감정은 별로 고상하지 못하다. 많은 본능이 그렇듯 선하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공포가 선의에서 우러난 슬픔이나 아름다움과 결합하면 막대한 감정적 위력을 발휘하게 마련. 그런 의미에서 늘 [장화, 홍련]의 팬이었고 스티븐 킹 단편집에서는 [예루살렘 롯]이 좋았다. [부유물], [사자의 상사병]에도 그런 종류의 정화효과가 있다.
게으르지만 이토 준지 새 책 소식을 들으면 당장 "보고싶다"는 욕구에 굴복하고 만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이 악당의 팬인 것이다. [사자의 상사병]이나 [부유물]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감성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안경을 쓴 (음침한) 남자는 지금도 캐릭터의 표정에 따라 자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움찔움찔 움직여가며(대부분의 만화가들이 그림 그릴때 캐릭터 표정을 따라간다나) 여동생 얼굴에 여드름을 짜는 오빠 그림 따위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우우, 뭐라고 해야할까... 너무 좋아 이토 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