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내란 재판 모두에서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이 부정 선거이다 보니, 어쩐지 예전에 부정선거의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은 책을 간행했던 출판사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심지어 그 이름도 '프로파간다'이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영 수상쩍어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의 책은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인데,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각종 부정 선거의 기법과 사례와 인물을 도해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물편에서는 이승만, 이기붕, 김기춘, 권영해, 권은희, 원세훈 등과 함께 윤석열에 대한 항목이 두 페이지에 걸쳐 나와 있기도 하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불거진 국정원 댓글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을 역임한 검사. 2013년 6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적용을 두고 법무부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162쪽) 그랬던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원세훈을 사면했으니 아이러니하다.


과거에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보수 정당 소속 이명박 정권의 부정 선거를 조사하며 이름을 알린 검사였는데, 나중에는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통령이 되어서 부정 선거 의혹을 들먹이고 앉아 있으니 희한한 노릇이다. 이쯤 되면 한국 역사상 부정 선거와 가장 연관이 많은 대통령이 되지 않겠나.


안타깝게도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은 현재 절판이다. 탄핵 정국에서 부정 선거 논란이 주목 받고 있음을 감안하다면 출판사의 성급한 결정이 영 아쉽기만 하다. 어쩌면 출판사에서도 이런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여 윤석열 항목에 대한 대대적인 보완과 함께 증보판을 준비할지도 모르겠다만.


또 한편으로는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이 "민주주의 선거 제도에 대한 교육 자료"(10쪽)가 되기를 바란다는 출판사의 애초 의도와는 정반대로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부정 선거를 주장하는 음모론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현실적인 우려도 해 보게 된다.


현직 대통령의 연령을 감안해 보면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보다는 책이 더 편하게 느껴질 법한 사람이고, 어차피 부정 선거에 관한 단행본이라면 프로파간다의 책이 유일하니,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대통령 집무실이나 관저의 책장에 이 책이 버젓이 꽂혀 있다고 해도 굳이 놀라진 않을 법하다.


어쩌면 책장에는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비밀기지 만들기>도 꽂혀 있을 법하다. 차벽을 세우고 직원을 동원해 관저를 요새화한 상태에서 안 나오고 버티던 모습이 너무나도 초딩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현직 대통령과 밀착된 프로파간다 출판사 자체도 좀 이상한 곳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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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맘바 이야기를 하느라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를 다시 꺼내 뒤적이다 보니, 환상 문학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에서 極(GK)체스터턴의 <정통>의 한 구절을 인용한 대목이 문득 눈에 띄었다. 마침 체스터턴의 대표작 세 가지가 새로운 번역으로 간행되었던데,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하다가 살짝 방향을 틀어서 판타지의 규칙 이야기나 해 보자.


체스터턴은 환상의 세계에서도 1+1=2라는 규칙은 마찬가지이며, 다만 황금과 호랑이가 열리는 나무가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환상의 세계라고 해서 배경에 자연 법칙이 없지는 않으며, 인물 역시 각자의 한계와 계약에 얽매인다는 뜻인데, 사실 인간 세계와도 유사한 그런 설정이 있어야만 인물과 사건과 배경 모두가 실감나게 마련이다.


"판타지 소설은 온갖 법 제도를 파괴하고 배수진을 치는 허무주의적 폭력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 2 더하기 1은 3이다. (...) 작용은 반작용을 낳는다. (...) 운명, 운, 필연의 힘은 (...) 판타지 소설 속 중간계에서도 거침없이 발휘된다. 판타지 소설은 (...) 서사적 예술로서의 의무와 책임의 지배를 받는다."(<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133쪽)


<반지의 제왕> 영화가 나왔을 때 어느 초딩이 '마법사가 너무 약하게 나왔다'고 불평하는 감상문을 내놓아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던 것도 그래서인데, 십중팔구 주문 한 마디로 대군을 쓸어버리는 게임이나 무협지의 묘사에 친숙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르귄의 소설만 봐도 마법사는 자연에 최대한 순응하다가 최소한으로만 개입한다.


톨킨과 르귄의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계약과 규칙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마에 흉터를 가진 아이가 살아남게 된 것도 모종의 규칙 때문이며, 학대를 당했던 친척 집이 오히려 안전한 장소였던 것도 비슷한 규칙 때문이고, 결국 만악의 근원인 악당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의외의 이유로 승리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심지어 불멸의 존재조차도 계약과 규칙에 얽매인다. 주인공 꿈(모르페우스)은 필멸자의 마법 주문에 사로잡혀 수십 년간 갇혀 지내다가 결계가 실수로 깨지고서야 가까스로 탈출하고, 비슷하게 억류된 전처 무사(뮤즈) 칼리오페를 구출할 때에도 무작정 규칙을 깨는 대신 감금자를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악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지옥에 온 꿈이 재치 대결에서 승리하자 루시퍼도 이를 갈며 순순히 보내준다. 역시나 DC 코믹스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 <콘스탄틴>에서 등장한 루시퍼 역시 계약과 규칙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막판의 반전에 허를 찔리자 계약과 규칙 내에서 상황을 최대한 수정한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도 소녀의 몸에 빙의한 악마는 십자가와 성수에 억제되는 규칙을 따르고, 기만의 명수답게 갖가지 말로 신부들을 미혹해서 풀려나고자 치밀한 심리전을 도모한다. <파우스트>와 <페터 슐레밀>을 비롯해 악마와의 계약을 소재로 하는 모든 문학 작품에서도 핵심은 계약의 빈틈을 각자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계약과 규칙이란 현실의 인간과 환상의 존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현직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존재이기에 상식도 법률도 위반하며 멋대로 행동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 오만(hubris)의 죄를 범한 필멸자의 운명을 보면 그의 최후도 그리 아름답진 못할 듯하다만...



[*] "뱃사람의 낙원"으로서의 極체스터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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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 노래 중에는 제목이 "아마겟돈", "슈퍼노바", "위플래시" 등 귀에 익은 것이 많던데, 애초에 다른 의미로 유명했던 단어를 가져와서 새로 의미 부여해 써먹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나귀님 보기에 제일 요상스러웠던 노래 제목은 "블랙 맘바"인데, 에스파 세계관에서는 악당의 이름이라 한다.


원래 맘바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독사를 가리키는데, 블랙 맘바는 길이가 2-3미터에 성질머리도 사나워서 현지인도 질색하는 놈이라 한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코비 브라이언트의 별명이었다고도 기억하는데, 한국 걸그룹의 노래에까지 언급된 맥락은 저 NBA 농구선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름의 유래인 독사가 아닐까.


그런데 로알드 달의 청년 시절 회고록에서 블랙 맘바에 대한 일화를 본 것 같아서 <단독 비행>을 오랜만에 꺼내 보니, 거기 언급된 뱀은 사촌 격인 초록 맘바였다.[*] 셸 석유 회사의 아프리카 동부 주재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하루는 지인의 집에 찾아갔는데, 자기보다 한 발 앞서 초록 맘바 한 마리가 현관문으로 기어 들어가더라나.


기겁한 달이 소리를 질러 위험을 알리자, 집주인 남성은 침착하게 아내와 두 아이를 베란다 아래로 내려서 집밖으로 대피시키고 나서 땅꾼을 부르러 떠난다. 잠시 후에 도착한 땅꾼이 혼자 집에 들어가 뱀을 상대하는 사이, 창문 너머 상황을 살피던 달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커다란 애완견이 죽어 나자빠진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땅꾼은 조용히 뱀에게 접근한 다음, 일단 갈퀴로 뱀의 몸통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런 다음 갈퀴를 천천히 밀어서 뱀의 머리 바로 밑까지 가져가더니, 그 상태에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어서 자루에 집어넣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려서부터 방울뱀을 잡고 놀았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역시 비슷한 수법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윌슨은 끝이 Y자로 갈라진 나무 막대로 뱀의 몸통을 누른 다음, 역시나 막대를 천천히 밀어올려 머리 밑까지 가져간 상태에서 손으로 머리를 잡아 들어올리라고 조언한다. 그는 파푸아뉴기니 개미 채집 원정에서도 이 방법으로 큰 뱀을 생포해 원주민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방심하다 물리기도 했지만.


그러고 보니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에도 집 근처에 나타난 방울뱀을 처리하기 위해 이웃이 출동해서 플라스틱 파이프와 쓰레기통으로 해결하는 일화가 나왔었는데, 저자가 뱀과 대치할 때 서로의 거리가 '5미터'쯤 되었다고 서술한 대목을 무려 '500미터'라고 오역했던 바로 그 글이다. 그런데 뱀을 생포한 부분도 오역이 있었다.


번역서에는 이웃이 뱀 앞에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쓰레기통 뒤로 가서 파이프를 뱀 위로 뻗어 흔들자, 놀란 뱀이 앞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고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웃이 뱀 앞에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뱀 뒤로 가서' 파이프를 뻗어 흔들자, 뒤에 있는 파이프에 놀란 뱀이 앞으로 도망가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만 했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번역자고 편집자고 별 생각 없었던 모양이다. 어슐러 르귄 정도면 고정 독자도 상당할 법한데, 좀 더 많은 애정을 쏟을 만한 관계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십중팔구 뭐가 틀렸는지 모를 테니 지금까지도 오역이 남아있지 않을까.


여하간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에스파 이야기로 무려 글을 세 편이나 쓰게 되었다. 원래는 "푸른 산호초" 직후 팜하니 찬양글을 길게 한 번 쓰려고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는데, 이후 청문회 출석이며 여러 논란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방시혁도 이상하지만 민희진도 이상한데, 애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뭐 음반을 산 것도 아니고, 응원봉을 산 것도 아니니 본격적인 덕질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귀님이야말로 팬질을 하기에는 영 자격 미달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일단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넉넉하지는 않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트집 잡기 좋아하는 성격상 뭐 하나에 끝까지 헌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동진 유튜브에서 <스타워즈> 팬의 기준을 마블 영화 팬의 기준으로 (즉 모든 영화를 극장 개봉으로 관람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아, 그렇다면 나는 평생 <스타워즈> 팬이 아니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시다시피 <제국의 역습>은 최초 공개 당시 국내에 수입되지 않았다) 어쩐지 홀가분한 느낌도 있었다.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톨스토이에 대한 고리키의 복잡한 감정이다. 후배 작가는 하늘 같은 저 선배를 우러러보았지만, 함께 있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미운 감정이 들었다고도 말한다. 마치 최근 어느 예능에서 유재석이 개그맨 김영철을 놓고 '못 보면 궁금하지만, 만나면 피곤해지는 후배'라고 설명한 것도 비슷하다 할까.


이런 양가감정을 체홉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톨스토이에 대해 종종 감탄한 듯 평가를 내놓으면서도 살짝 빈정거림을 곁들인다. 인간성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진 후배 작가들이니, 러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성인으로 추앙되는 위대한 선배 작가의 이중적 측면을 꿰뚫어 본 까닭에 '팬'이나 '신도'는 되지 못했던 것이 아니려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정적인 측면과 모순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런 사실은 굳이 MBTI인지 TSMC인지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본인이 그런 모습을 애써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기 기만이라면, 타인이 그런 모습을 감지하고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최대한 긍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은 헌신이고 믿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아이돌 팬 문화는 이른바 '영성에 관심은 있지만, 종교는 갖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김호중 음주 운전 논란에서처럼 팬이 가수의 범죄까지 적극 비호하고 나선 것을 보면, 팬질을 넘어 컬트의 가능성마저 엿보이니...



[*] 글을 쓰고 나서 <단독 비행> 전반부를 다시 읽어보니, 초록 맘바 이야기 말고 블랙 맘바 이야기도 별도로 있기는 했다. 하루는 저자가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하인의 뒤쪽에서 블랙 맘바 한 마리가 몰래 접근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놀란 저자가 위험하다며 소리를 지르자, 상황을 파악한 하인은 침착하게 서 있다가 사정거리 안에 접근한 독사를 갈퀴로 때려 잡는 것으로 나온다. 그 외에 사자에게 물려간 여자의 일화도 있고, 카렌 블릭센(이자크 디네센)을 잘 아는 여자의 일화도 있고,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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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스파의 카리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번 연애 논란이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팀과 멤버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인 이력까지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노래부터 영 낯설다 보니 한창 유행할 때에도 딱히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 나중에 시구 영상을 보니 의외로 잘하기에 '공 잘 던지는 아가씨는 못 참지!' 하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SM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되어 신곡이 나오면서 유튜브에서도 쌍둥바오와 김루이와 미소아라티티만큼 자주 접하며 자연스레 친숙해지게 된 셈이다.


다만 에스파의 노래만큼은 제목부터 영 나귀님 취향이 아니고, 가사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굳이 들을 마음이 없었는데, 최근 카리나가 출연하는 어느 방송에서 가수 거미가 새로 부른 "아마겟돈" 영상을 보니, 저 노래가 결국 저런 내용이었던 건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노래방에서 혼자 부르면 마치 불경 외우는 느낌이 들더라는 누군가의 댓글처럼, 듣기에는 그럴싸한데 막상 재현해 보면 영 이상한 것이 아이돌 노래의 특징은 아닐까. 이른바 최근 음악계의 양산형 유행가가 끼친 해악에 대해서는 음악 유튜버 릭 비아토도 줄곧 비판한 바 있다.


여하간 "아마겟돈"도 스리슬쩍 들어 봤으니 또 하나 들어 봐야겠다 싶어서 틀어본 것이 이른바 "효녀 카리나" 쇼츠에 나온 리허설 때 부른 곡인 "에너지"였다. 제목은 에스파(Aespa)의 철자처럼 "에너지"(Aenergy)라고 쓰지만 실제 노래에서는 "아이너지"처럼 발음하는 듯하다.


이건 그나마 다른 노래보다는 좀 낫구나 싶어 연속 재생을 하다 보니 서서히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뭐 우리를 누가 보냈고 카리나는 무쇠팔 무쇠다리이고 어쩌구 하기에, 그제야 이 내용이 이 걸그룹의 세계관인지 부캐인지 하는 설정에 대한 일종의 해설임을 깨달았다.


이른바 3대 기획사 중에는 SM이 이런 설정놀음에 제일 열심인 것 같은데, 나귀님이 알기로는 엑소라는 남돌부터 본격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레드벨벳 때에는 확실히 없었으니까). 거기서도 뭐 외계에서 온 능력자라고 해서 멤버마다 제각기 특기를 지닌 것으로 나온다나 뭐라나.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세계관 설정이 팬들 사이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지 몰라도, 나귀님 같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상당히 오글거린다는 점이다. 아마 멤버들도 비슷한 느낌인지, 언젠가 <아는 형님>에 출연한 엑소도 각자의 능력을 비꼰 이수근의 드립 앞에 너덜너덜해졌었다.


그렇다면 에스파의 세계관 설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귀님도 차마 본격적으로 파헤칠 엄두까지는 나지 않지만, 대강 파악한 바에 따르면 에스파의 멤버 네 명은 외계에서 뭔가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된 일종의 사자이며, 무쇠팔 무쇠다리를 비롯해 저마다 다른 능력을 지녔다.


그런데 "에너지"는 에스파의 세계관 설정을 소개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서사 무가의 본풀이와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강신무가 접신을 위해 주문처럼 짧게 반복하는 무가와 달리, 서사 무가는 인물과 줄거리를 갖추고 세습무가 마치 판소리 사설처럼 구연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당이 섬기는 신의 내력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본풀이로는 "바리데기"가 있는데, 주인공이 비범한 탄생, 억울한 시련, 이세계 여행, 시험 통과, 귀환과 신격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는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이른바 '영웅의 여정' 도식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만화 <신과 함께>에도 등장해서 유명한 강림이 염라대왕을 체포해 온다는 내용의 "차사본풀이"도 유명하다. 아들 삼형제를 잃었다는 어머니의 호소에 시달린 원님의 명으로 강림이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데려오고, 사건 마무리 후에는 아예 이직(?)하여 차사가 된다는 내용이다.


가뜩이나 무속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한데 어디 감히 에스파 노래를 서사 무가에 비견하느냐고 분노할 만한 팬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비상 계엄 직후 군 장성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내란 혐의로 사형이 집행되면 최영과 임경업에 버금가는 몸주들이 줄줄이 나오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이와 유사한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내용의 구비 서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비롯해 전세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므로, 어떤 면에서는 에스파의 오글벅적한 무쇠팔 무쇠다리 세계관 설정 서사도 마블 영화를 비롯한 각종 창작물에서 나타난 원형의 반복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나귀님도 그냥 포기하고 "에너지"를 들어야 하나 싶기도 한데, 이상한 점은 첫 앨범의 수록곡인 "리브 마이 라이프"처럼 비교적 멀쩡한(?) 곡도 있다는 점이다. 레드벨벳 느낌이라 귀에 쏙 박히던데, 차라리 그냥 평범한(?) 컨셉으로 나왔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구글링해 보니 에스파 세계관은 노래와 앨범을 통해 계속 전개되는 중이라는데, 문제는 멤버들도 이제는 과한 설정에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는 거다. 최근 이영지 프로에 나와서도 세계관을 언급하자 무척 민망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물론 곧이어 존박이 훨씬 더 민망해졌지만).


물론 당장 데이비드 보위의 명반 <지기 스타더스트>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정놀음이 있었고, 공상과학소설이나 마블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점에서도 호소력이 있을 법하다. 다만 나귀님 입장에서는 그걸 멤버들 스스로도 오글거려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ㅋㅋ)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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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US 스틸 매각설을 접하고 나니 문득 예전에 뒤적여 본 모건 관련 자료가 생각나서 옥탑방에 올라갔다가, 마침 책더미에서 <청년 고리끼>(필리아 홀츠만 지음, 이강은 옮김, 푸른산, 1989)가 눈에 띄기에 그것까지 꺼내서 내려왔다. 지난 여름 물난리에 책더미를 크게 한 번 뒤집어 엎었더니 평소 안 보이던 책도 눈에 보인다.(근데 <규합총서>는 왜...)


<청년 고리끼>는 1980년대의 전형적인 사회과학 출판사 책이다. 나귀님은 이걸 '이론과실천 계열 디자인'이라고 분류하는데,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론과실천, 이성과현실, 동녘/친구 같은 예전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디자인이 어쩐지 유사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종의 계열사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외주 디자이너가 똑같았을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책을 뒤적이다 보니 역시나 예전 사회과학 책답게 역자 후기도 없고, 따라서 저자나 원제에 대한 정보도 없기에 뒤늦게야 구글링 끝에 기본적인 서지사항(The Young Maxim Gorky 1868-1902 by Filia Holtzm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48)을 알아냈다. 저자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학자라지만, 옛날 책이다 보니 지금은 거의 잊힌 듯하다.


지난번 체홉에 대한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최근 들어 고리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원인은 바로 단첸코의 회고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전부터 이 작가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물론이고 전기까지도 꾸준히 구입해 왔다. 한때나마 <어머니>가 대학생의 필독서로 여겨진 까닭인지, 다른 작품들도 우후죽순 격으로 잔뜩 나와서 헌책방에 흔히 널린 까닭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지난번 체홉을 읽었을 때처럼 고리키 관련서를 싹 모아서 전기부터 장편과 단편과 에세이와 회고록까지 독파해 볼까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하다 보니 이제 겨우 전기와 단편집 몇 권을 한 자리에 모았을 뿐이다. 그 사이에 단편집 몇 가지도 새로 나온 모양이니, 체홉 때처럼 겹치는 작품이 있는지 비교 분류하는 것부터 만만찮은 일이 되겠다.


고리키의 단편 중에서는 황장엽이 회고록에서 인용했던 "매의 노래"가 기억나고, 창비의 러시아 단편집에서 처음 읽은 "남자 스물여섯과 여자 하나"도 기억난다. 특히 후자는 뭔가 좀 기묘한 내용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에 깊이 남았는데, 필리아 홀츠만의 전기에 따르면 고리키가 젊은 시절 어느 빵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삼았다고 한다.


이 단편에서는 빵공장의 허름한 지하 작업장에서 싸구려 과자를 만드는 남자 스물여섯 명이 등장한다. 다른 노동자들의 외면과 경멸 속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까닭에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한 그들이었지만, 매일 한 번씩 그곳에 찾아와 창문 너머로 스스럼없이 말을 걸며 과자를 하나씩 얻어 먹는 발랄한 재봉사 아가씨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급기야 남자들은 그녀에게 단순한 연모를 넘어서 우상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녀에게 따끈한 크렌젤리를 대접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겼고, 우리에게는 [그 과자가] 우상에게 바치는 매일매일의 제물과도 같은 어떤 것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거의 거룩한 의식처럼 되었고, 날이 갈수록 우리를 그녀에게 더욱더 밀착되게 했다."(134쪽) 


그런데 다른 작업장에 새로 온 제빵사가 '어떤 여자든 금방 유혹할 수 있다'고 자랑하자, 불쾌해진 지하 작업장의 남자들은 '우리 아가씨는 못 건드릴 걸'하고 장담하고, 급기야 바람둥이가 시한 내에 그녀를 유혹할 수 있을지를 놓고 내기한다. 불안과 초조 속에 기다리던 스물여섯 명은 자기네 우상이 바람둥이와 밀회하고 걸어나오는 광경에 그만 눈이 뒤집힌다.


분노한 남자들은 지하 작업장에서 뛰쳐나와 아가씨를 에워싸고 그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쌍욕을 퍼붓는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던 그녀였지만, 남자 중 하나가 손을 뻗자 격분해서 뿌리치며 '더럽고 천한 것들'이라고 불쾌와 경멸을 드러낸다. 아가씨의 당당한 태도에 남자들은 비로소 자기 신세를 자각한 듯 쓸쓸히 지하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상에 대한 환멸과 현타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씁쓸한 편인데, 어찌 보면 지난번 카리나 연애 논란 당시 팬들의 반응도 이 스물여섯 명의 남자와 유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사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일인데도 팬들은 분노하며 사과를 요구했고, 결국 당사자가 결별과 사과까지 내놓고 나서야 성난 팬심이 잠잠해졌다니 말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팬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쌍방 소통이 원활한 까닭인지 그 파급력도 훨씬 커진 듯하다. 일각에서는 라이브라는 명목으로 사생활을 일부 공개함으로써 마치 유사 연애의 느낌을 강조하는 행태가 문제라고도 지적하니, 그 모두의 배후에는 결국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해도 무관하겠다.


지난번 김호중 음주 운전 논란에서도 연예인의 위법 행위조차 두둔하는 비뚤어진 팬심을 향한 비판이 많았는데, 카리나 연애 논란은 바로 그런 무조건적 애정이 여차 하면 무차별적 분노로 변모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는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나귀님 입장에선 영화 <그녀>에서처럼 일대다 소통이 일대일 소통으로 오인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연예인의 경력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못하니, 언젠가는 인기도 시들고 관심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보이그룹 멤버도 지금은 처량한 노총각 신세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던데, 한번은 그 어머니가 '예전에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 많은 아가씨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느냐'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한때 '우리 오빠'의 연애와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우기던 팬들도 지금쯤은 대부분 가정을 꾸렸을 법하니, 이쯤 되면 시누이의 입장에서 제발 누구라도 '우리 오빠' 좀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태세가 역전되지 않았을까. 물론 팬들이 호시탐탐 지켜보는 중에도 혼전 임신 '사고'로 은퇴하는 아이돌도 줄곧 있었으니, 결국 할 사람은 알아서 하는 모양이지만.


인생 전체를 살펴보면 연애나 결혼이나 출산 같은 단계도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인데, 연예인의 경우에는 이를 애써 은폐해야 한다니 이상하다. 조용필의 첫 결혼이 비밀리에 거행되어 뒤늦게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일을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서는, 지금처럼 남녀관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세상에도 연예인만큼은 예외로 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아이돌의 경우에는 열성 팬들의 행태가 문자 그대로의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듯하니, 급기야 김호중 사건에서처럼 팬심이 '신앙'의 단계로 고양되기까지 하는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최근 깨닫게 된 정의에 따르면 '팬'은 사실상 '신자'나 다름없어야 한다니까, 그런 맥락에서 나귀님 같은 사람은 평생 그 누구의 팬도 될 수 없다고 봐야 될 듯하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그리스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쾌활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네팔의 쿠마리처럼 음울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없지 않다. 그 전통에서는 어린 소녀를 눈 셋 달린 여신의 현현으로 간주해 숭배하다가 월경이 시작되면 신성이 사라졌다며 내치는데, 문제의 소녀는 이후 불길하다 간주되어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배척당하며 산다.


마치 쿠마리 전설을 각색한 만화 <3X3아이>처럼 지나치게 잔인한 비유가 아닌가 싶지만, 아이돌 범람 시대에 7년 계약을 다 채우지 못하는 팀들이 즐비한 상황에서는 제법 의미심장해 보인다. 하긴 늙고 초라한 우상을 섬기는 신자는 없을 터이니, 어쩌면 '우상'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부터 젊음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고, 늙음이 시작되면서 퇴출되는 것은 아니려나.


아이돌에 열광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징이자 어떤 면에서는 특권인 까닭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어차피 나이 들면 하고 싶어도 못하고, 누가 하라고 해도 못하게 마련이니까. 그 시기를 넘어서도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함께 늙어가는 보기 드문 연예인과 팬이라면, 이미 단순한 팬심을 넘어서서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법하다. 


우상의 몰락은 씁쓸한 일이다. 물론 연예인 걱정이 제일 부질없다지만, 늙어서라도 활동하면 다행일 수 있다. 20세기에 활동한 아이돌 가운데 큰 사건사고 없이 연애나 육아 등으로 방송에서 사생활을 판매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폭력이나 음주운전이나 도박이나 마약 같은 범죄에 휘말린 경우는 물론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 고리키의 소설에서 우상처럼 숭배했던 여자에게 실망을 느끼고 커다란 분노를 표현했던, 하지만 상대방의 매몰찬 태도에 자신들은 그간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쓸쓸하게 지하로 숨어들었던 스물여섯 명의 남자들처럼, 어쩌면 현재 아이돌 산업을 소비하는 팬들도 그런 실망과 환멸의 가능성을 줄곧 안고 살아가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군통령 카리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라도 했지, 대통령 윤석열은 도대체 무엇을 주었기에 구속 영장 발부에 지지자들이 법원 난입까지 불사하며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카리나는 사과라도 했지만, 윤석열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버틸수록 팬심이 비등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진정한 아이돌은 카리나가 아니라 윤석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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