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현역 장교가 내연 관계인 여성 군무원을 살해하며 벌어진 이른바 '화천군 북한강 토막 살인 사건'이 밝혀져서 한창 떠들썩했었다. 그런데 마침 가해자인 양광준의 얼굴이 공개되자, 이를 보도한 어느 뉴스의 아나운서가 대뜸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얼굴만 봐서는 흉악스럽게 생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걸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롬브로소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전에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 범죄인>을 꺼내서 훑어본 다음이고 보니, 범죄자의 외모와 그 범죄성의 관계를 언급한 뉴스 아나운서의 발언에 문득 저 근대 이탈리아의 범죄학자가 심어 놓은 대중적 선입견이 얼마나 지속적인지를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는 '범죄학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다. 그 이론의 핵심은 '태생적 범죄자'이다. 즉 범죄란 문명에 반대되는 원시적 행위이며, 범죄자란 원시적 악덕이 격세유전으로 발현된 사례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범죄가 의도적이므로 엄벌하자는 베카리아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범죄자의 선처를 호소한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롬브로소의 범죄학은 그 방법에서 여러 가지 허술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범죄인>은 영어판 편역본을 재번역한 것인데, 영어판 편역자는 롬브로소의 사상이 왜곡되고 오해되었다고 항변하면서, 이 저자가 19세기의 통념을 답습한 동시에 혜안도 보여준 부분에 주목하자고 권유한다.


물론 롬브로소의 범죄학이 역사적으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과학적 범죄인류학'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오늘날에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봐야 맞을 듯하다. 비록 진화론과 인류학 같은 나름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긴 했지만 주먹구구식에 불과하며, 애초 장담과 달리 과학적이지도 엄밀하지도 못한 주관적 해석이 많기 때문이다.


롬브로소의 이론에서 가장 악명 높은 대목은 골상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귀가 커서 도드라지는 것'을 범죄자의 특성으로 간주하는 식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저서인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사이비 과학인 사회적 진화론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물론 롬브로소의 영어판 편역자들은 굴드가 왜곡했다고 주장하지만).


주저인 <범죄인의 탄생>(1867)만 해도 범죄자는 열등한 존재라는 전제로 시작하며, 자매편인 <여성범죄인>(1893)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따라서 롬브로소의 저술 역시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관련 저술처럼 그저 개척자로서의 의의와 역사적인 가치만 지닐 뿐,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는 불가능한 내용이다.


다만 그 이론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근대 범죄학의 창시자로서 롬브로소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사람의 외모와 범죄 성향의 관련성을 은연중 떠올리게 되는 버릇이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악역 전문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서 반복되고 강화되면서 강아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범죄의 유전적 소질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지만, 자칫 범죄로 이어지기 쉬운 과격한 성격 같은 경우에는 집안 내력의 영향도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여기에 에드워드 O. 윌슨이 개척한 사회생물학의 결론 같은 것을 감안하면 마치 롬브로소의 이론이 현대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보이지만, 설령 방향이 얼추 맞더라도 '범죄인' 이론은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오늘날에 와서 롬브로소의 기여를 굳이 찾자면 사상 최초로 범죄라는 사회 현상을 과학과 통계 같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정작 그 창시자 본인의 실제 행동이 그리 엄밀하지 못한 까닭에 그 주장 자체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반면에 외모와 범죄의 연관성 같은 대중의 편견만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아쉽다고 하겠다.


물론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편견임을 알더라도 막상 떨치기는 어려운데, 어떤 면에서는 롬브로소가 조장한 이런 편견이 꽤나 보편적 편견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레스코프의 소설 <괴물 셀리반>이 멋진 반박을 제공하고 있지만,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레스코프의 교훈보다는 롬브로소의 이론을 따라 살아가는 듯하다.


그나저나 철 지난 롬브로소의 이론을 오늘 다시 되새겨본 까닭은 며칠 전 대전에서 일어난 현직 교사의 초등학생 살해 사건 때문이다. 사건의 성격이나 잔혹성 모두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보니 크게 공분이 일어난 상황인데, 어쩌면 사건의 여파나 국민적 관심의 정도를 감안해서라도 조만간 가해자의 얼굴과 실명 등 인적사항이 공개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만약 얼굴이 공개되면 십중팔구 롬브로소의 유산인 외모와 범죄성에 대한 언급도 여기저기서 뒤따라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멀끔하지 못한 외모에서부터 범죄성이 농후했었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이와는 정반대로 멀끔한 외모 뒤에 범죄성을 숨기고 있었으니 가증스럽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을 법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근거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 기억을 더듬어 보니, 롬브로소의 저서는 1970년대에 나온 을유문화사의 (세로쓰기) 세계사상전집 가운데 한 권에 수록된 <천재론>을 읽은 것이 처음이었다.(이건 지금도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된 듯하다).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 범죄인>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법사학자들이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발췌해서 편역한 영역본을 재번역한 것이다. 편역자들은 롬브로소의 저서가 이전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영어권에 소개된 적이 없으며, 그로 인해 오해와 왜곡이 벌어졌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로운 영역본 편역서에서는 롬브로소의 주장을 온전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평하지만, 사실 이것도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오늘날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나 중언부언 산만한 부분은 모두 걸러낸 편집본인 한에는 원저자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온전히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려울 법하다. 여하간 의의도 있지만 한계도 뚜렷한 롬브로소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도 오래 전에 사다 놓은 것이 있으니 다시 꺼내 뒤져 보아야 하는데 귀찮...


[**] 글을 올리면서 보니 <범죄인의 탄생>의 또 다른 번역본도 <태생적 범죄자>라는 제목으로 나온 모양인데, 알라딘 서지정보에는 관련 소개 내용이 부족한 까닭에 어떤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저자명부터 "롬브로소 체세레"라고 쓴 것을 보면 그리 신뢰할 만한 번역본까지는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런 나귀님의 태도 역시 외모와 범죄성에 대한 저 범죄학자의 유산처럼 편견에 불과하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신문 기사를 보니, 최근 탄핵 재판을 통해 점차 뚜렷해지는 현직 대통령의 부정 선거 주장을 비롯한 각종 음모론의 출처가 다름 아닌 극우 유튜브라는 지적이 있다. 평생 칼잡이 노릇을 하며 각종 법률을 뒤적여봤던 사람이니 뭔가 더 거창한 파시즘이라도 구상했던 걸까 싶었더니만, 기껏해야 극우 유튜버 따위에 선동당해 망동을 저질렀다니 한심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굳이 남을 흉볼 것도 없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 동영상 사이트뿐만 아니라 모바일 기기를 이용하는 사람 대부분이 알고리즘의 노예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푸바오 동영상을 하나 보면 계속 자연농원 콘텐츠만 추천되고, 수도꼭지가 고장나서 휴대전화로 하나 검색하면 계속 수도꼭지 판매 광고가 따라다닌다.


바깥양반이 쓰는 태블릿으로 종종 유튜브를 시청하는 나귀님이다 보니 그놈의 알고리즘 때문에 골탕 먹은 적이 종종 있다. 한 번은 기타 연주 동영상을 찾다 보니 웬 아가씨가 코스프레 차림으로 나와서 실력을 뽐내는 것이 추천된다. 그래서 몇 개 봤더니만, 나중에는 아예 비키니 차림으로 연주를 하는 동영상까지 연이어 추천되는 바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유튜브에 이상한 동영상이 추천되기 시작하면 재빨리 강아지와 고양이 영상을 마구마구 클릭해서 알고리즘을 정화하면 된다기에, 바오가족부터 미소아라티티며 다람쥐츄츄며 루몽다로까지 총동원해서 간신히 바꿔놓기는 했는데, 그래도 잊을 만하면 그놈의 아가씨가 또다시 헐벗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동영상이 떠서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가만 살펴보니, 십중팔구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의도로 과감한 노출을 시도하는 동영상 제작자들이 많은 모양이다. 언젠가 낚시 콘텐츠에서도 웬 아가씨가 나오는 동영상이 추천을 많이 받았기에 도대체 뭘 잡았나 궁금해서 한참 들여다보았는데, 물고기 잡는 장면은 없고 그냥 몸에 착 달라붙는 옷 입고 물가를 돌아다니는 것밖에는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어느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에로티시즘의 궁극은 다 벗기는 게 아니라 살짝 입히는 것이라던데, 나귀님은 아직 그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는지, 입었건 벗었건 간에 결론만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즉 비키니를 입건, 레깅스를 입건, 아니면 홀딱 벗었건 간에 기타를 잘 치는지, 낚시를 잘 하는지, 아니면 다른 일을 잘 하는지 여부만 그저 궁금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제프 벡의 베이시스트 탈 윌켄펠드가 그런 경우다. 수년 전 타계한 저 유명 기타리스트의 라이브 동영상 가운데 하나에서 함께 등장해 연주하는 모습으로 처음 봤는데, 중년 아재들 사이에서 나이도 어려 보이는 (실제로 20대 초였다!) 아가씨가 산발한 머리로 잘 따라가는 모습이며, 그걸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호응하는 벡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벡은 윌켄펠드가 솔로 연주를 할 때마다 만면에 미소를 짓는가 하면, 심지어 '아이고 무서워라!' 하는 몸짓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아가씨 역시 솔로 연주를 끝마치면 '나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다 서로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미 페이지가 객석에 앉았고 에릭 클랩턴이 게스트로 나왔던 어느 클럽 공연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빠와 딸 뻘인 거장 기타리스트와 신예 베이시스트가 척척 호흡을 맞추는 모습에 감동한 사람이 많았는지, 급기야 그녀가 그의 딸이라는 헛소문까지도 돌았던 모양이다. 제프 벡 타계 후에 탈 윌켄펠드가 SNS에 올린 추모 글에서도 '진짜 아빠처럼 돌봐주신 까닭에 내가 친딸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한동안 위키피디아에 적혀 있기도 했다'는 내용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어디선가 탈 윌켄펠드가 인기를 끈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슴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베이스의 형태상 위쪽 굴곡에 오른쪽 가슴이 자연스레 얹히며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었는데, 얇은 티셔츠에 노브라이다 보니 젖꼭지가 도드라진 모습이 보였다는 거다. 나귀님은 눈이 나빠서인지 화면이 작아서인지 잘 보이지도 않던데, 어떻게 그걸 또 찾아냈을까.


아쉬운 점은 제프 벡과 탈 윌켄펠드가 함께 한 공연이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인지, 이미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다 보고 나니 더 이상은 알고리즘에서도 추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도 생각나서 하나 틀어 보았는데 이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다. 그러고 보니 래리 칼튼의 스틸리 댄 기타 솔로도 작년에는 하루 한 번씩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나오지 않고.


물론 유튜브도 처음부터 아무거나 추천하는 것은 아니고 과거 검색 이력을 토대로 삼는 것이니 나름대로는 논리적이고 편리할 수 있겠지만, 나귀님의 경우에는 종종 일종의 참견이자 족쇄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SNS나 포털 사이트에서도 검색 결과를 이용해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는 세상이니, 이것도 일종의 감시 사회가 아닌지.


비키니 기타 연주 동영상 따위는 안 보는 사람도 알고리즘의 냉혹함을 무시했다가는 언젠가 낭패할 것이다. 한 번은 하수구 수리를 알아보려고 현직 유튜버의 동영상을 하나 틀었더니만, 이후로는 유튜브만 접속하면 구체적으로 현장 내시경 화면까지 포함해서 하수구 뚫는 동영상만 줄기차게 나오는 바람에 한동안 식사 중에는 라디오만 들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마치 콘텐츠가 무궁무진해 보이는 유튜브에도 한계 효용 법칙이 적용되는 듯하다. 뭐든지 처음에나 신기했지 나중에는 익숙해져 시들한 것이 사람 심리이다 보니, 심지어 넷플릭스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결국에는 '볼 게 없다'는 푸념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유튜브도 마찬가지인 듯한데 알라딘은 또 채널을 신설했다 하니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먹으면서 NBC 뉴스를 보는데, 미국의 어느 학교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판정에 불복하며 링크에 뛰어나가 학생 심판을 밀친 막장 학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바깥양반이 휴대전화로 뭘 검색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밀치다'(shove)라는 단어가 있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네."


언어 덕후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어 애호가쯤은 되는 바깥양반이고, 특히 영어를 잘 해서 중학교 때부터 동급생을 상대로 과외를 해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하지만 엄마한테 다 빼앗겼다!) 대학 시절 내내 생계 수단이었을 정도인데, 가끔은 터무니없이 쉬운 단어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한 번은 "메기"(catfish)를 보고는 저게 뭐냐고 묻기에, 톰과 헉이 낚시로 즐겨 잡은 물고기 아니냐고 대답해 주었더니만 처음 보는 단어란다. 물론 나귀님도 항상 다 알진 못하니 한 번은 바트 심슨이 칠판에 쓴 "광합성"(photosynthesis)이라는 단어를 "사진 합성"으로 오해한 바 있다.


이런 무지나 오해가 발생하는 까닭은 당연히 영어가 모국어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의 분야며 기호에서는 자주 접할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니, 누구나 모르는 말이 있고, 또 의미를 잘못 아는 말이 있다. 


즉 언어란 것은 아무리 알아도 다 아는 게 아니다. 자칭 언어 학습 권위자들은 완벽이니 정복이라는 말을 종종 입에 올리지만, 그게 말이 쉽지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 아무리 공부해도 모르는 단어가 있고, 아무리 책을 읽어도 모르는 내용이 있고, 알던 것도 곧잘 잊어버리게 마련인데.


그러고 보니 최근 나온 책 중에 일본인 히키코모리가 인터넷으로 루마니아어를 독학해 현지에서 작가로 등단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알라딘에서 '루마니아어'나 '루마니아'로 검색해 보아도 나오지 않으니, 뭔가 제목이나 부제에라도 그 나라 이름을 넣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구글링해 보니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라는 책인데,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노라 에프런의 일화에서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 제목'으로 꼽힌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의'(of)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어떤 영화 제목(지금도 기억이 안 난다!)만큼이나 기억에 남지 않는 제목이다.


물론 루마니아에 대해서라면 그곳 출신 저자의 책 몇 권을 읽은 것이 전부인 나귀님이지만, 언젠가 듀이 십진분류법에서 언어(400) 분야의 하위 분류에 루마니아어가 영어(420), 독일어(430), 프랑스어(440), 스페인/포르투갈어(460)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을 보고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동유럽의 올망졸망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인구나 영향력도 많지 않은 루마니아인데, 어째서 언어는 이렇게 중시되는 걸까? 알고 보니 루마니아어가 슬라브어보다는 로망스어에 가깝다 보니, 19세기 유럽중심주의의 산물인 듀이 십진분류법에서 이탈리아/루마니아어(450)로 분류된 것이다.


반면 유럽의 대표 언어 예닐곱 가지 이외의 모든 언어를 '다른 기타 언어'(490)로 몰아넣어서 지금 현실에는 안 맞다 보니, 이제는 나라마다 수정판 십진분류법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국 십진분류법에서는 언어(700) 분야의 이탈리아어(780) 항목에 루마니아어(789)가 들어가 있다.


인터넷 시대가 되니 언어 학습의 방법도 달라져서, 지금은 한국 드라마나 가요에 심취한 끝에 한국어 능력자가 되었다는 외국인도 많이 나오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예전에도 미국 팝송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어 영어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된 '덕후'들이 적지 않았었지만.


바깥양반도 언어 애호가라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배우기는 한 모양이고, 그중에서도 라틴어와 일본어와 독일어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독학했던 모양이다. 나귀님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문법책이나, 콥트어와 우가릿어 사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일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학 능력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바깥양반이 어떤 독일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사전에도 없는 이상한 단어가 나온다며 투덜거리기에 흘끗 보니 "Brechts Svejk"였다. "브레히트가 각색한 <병사 슈베이크>"를 말하는 것 아니겠냐니까 "깜놀"하더라는.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이스라엘 셰플러의 <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에 나오는 고전학자 해리 울프슨의 일화다. 갓 입학한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이러저러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하자, 반색하며 자기가 가진 책을 꺼내 건네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네, 페니키아어는 할 줄 알겠지?"


민음사의 번역본은 워낙 오역투성이라서 추천할 수 없지만, 울프슨의 인품과 학식을 보여주는 일화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연구로 유명했던 이 학자의 업적도 지금은 구닥다리라 거의 잊히고 말았다니, 학문의 세계 역시 언어의 세계처럼 얼마나 넓디넓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 이집트 상형문자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책도 나왔던데, 한때 <람세스>라는 소설의 인기 덕분에 이집트 관련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면서 (지금은 다 절판되었지만) 덩달아 상형문자에 관한 책도 몇 권 나왔었다. 지금은 전공자도 생겼다니 관련서도 더 늘어나지 않을까.


이집트 상형문자라고 하니, 예전에 단골 헌책방 사장님에게 들은 한 가지 기막힌 사연도 생각난다. 예전의 단골 손님 중에 중년의 언어 덕후가 있어서 언어에 대한 외국 서적이 나오면 반색하며 구입했는데, 그 손님이 가장 애타게 찾던 것이 영어로 된 이집트 상형문자 문법책이었다고 한다.


급기야 제목과 저자 이름까지 적어서 건네주며, 얼마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꼭 구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나. 헌책방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책을 무작정 구해 달라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그냥 알았다고만 하셨는데, 나중에 진짜로 그 책이 나왔다!


하지만 그 언어 덕후 손님은 안타깝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이라, 그토록 찾던 책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땅한 임자도 없는 책이 되고 말았지만, 그 사연이 참으로 딱하고 기막히다 보니 헌책방 사장님도 그 상형문자 책을 차마 팔지 못하고 갖고 계셨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평소 앉아 계시던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낡고 두툼한 책을 꺼내 보여주셨는데, 한 눈에도 반세기 이상은 묵은 것처럼 보이는 느낌이었다.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니 사진으로 남기지도 못했는데, 제목이라도 적어 놓을 것을 그랬나 싶어 아쉽기도 하다.


헌책방을 하다 보면 책과 사람의 인연을 숙고하게 된다고 종종 말씀하셨던 사장님이신데, 지금은 아쉽게도 가게 운영을 그만 두시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이집트 상형문자 문법책은 어떻게 되었는지 가끔 궁금한 생각도 든다. 물론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였다면 당연히 매입 불가였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재간행된 모양인데, 어째선지 제목이 <버진 수어사이드>로 바뀌어 나왔다. 그렇다면 "그날 아침은 리즈번가에 남은 마지막 딸이 자살할 차례였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도 "그날 모닝은 리즈번가에 남은 라스트 도터가 수어사이드할 턴이었다"로 바뀌었나 싶어 살펴 보았더니 아니라서 실망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처녀"와 "자살" 모두 최근 기피어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구글북스에서 "버진"으로 검색해 보니 내용상 "처녀(아가씨)", "동정녀(마리아)", "동정(첫경험)" 등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책 소개글에서 "앳된"을 "애띤", "섬찟"을 "섬ㅉㅣㅅ "으로 쓴 것처럼 출판사 나름으로는 고심해서 내놓은 결과물인 것 같다.


사실 작품의 여러 가지 문맥 모두에 그나마 자연스레 어울리는 단어는 "동정"(童貞)"일 것인데, 제목부터 "처녀 자살"과 "동정 상실"(중간에 기묘한 시가 나온다!)로 중의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번역 제목인 <처녀 자살 소동>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은 것이 아쉬웠는데, 이제는 <처녀들, 자살하다>로도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소설은 "자살한 다섯 자매", 영화는 "버진 수어사이드"로 다르게 옮기고, 중국에서는 소설과 영화 모두 "사망일기"이며, 다른 나라들도 "버진 수어사이드"로 음역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보면, 어디서나 그놈의 제목 때문에 골치를 앓기는 앓았던 것 같다. 같은 작가의 첫 작품인 <미들섹스>도 마찬가지였으니, 이쯤 되면 상습적이라고 하겠다.


영어 초보인 한국 남성이 젊은 미국 여성에게 "버진이세요?"라고 물었다가 망신당했다는 일화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오래 된 유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처녀"라는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일본에도 비슷한 유머가 있다. 미국 기차역 매표구에서 잠시 망설이던 일본인이 "에또..."라고 말하자 기차표 여덟 장이 나왔다는 거다!)


언젠가 유모차/유아차 논란에서도 언급했지만, 한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일상 대화를 비롯한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처녀"나 "아가씨" 같은 단어를 기피하는 최근의 풍조는 무지보다는 억지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즉 충분히 다른 뜻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거다.


"총각"도 원래는 춘리 비슷한 헤어스타일에서 비롯된 단어라지만, 젊은 남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굳어진 그 말을 이제 와서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도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붉은 악마"처럼 원래는 비하와 멸칭이었던 단어조차도 긍정적인 맥락으로 해석하여 수용한 경우가 있으니, 한때 별다른 악의 없이 쓰던 단어를 이제 와서 기피하는 것도 이상하다.


물론 한끗차이인 "의원"과 "인원"을 가지고 헌법재판소에서 매일 같이 팽팽한 대립이 벌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 "처녀"가 "버진"이 된 것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고, 잘 살펴보면 "버진"이 아니라 "바진"이나 "비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처녀"가 "버진"으로 대체되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으면 결국에는 리처드 브랜슨만 혼자 웃게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탱 게르 이야기를 하려니 자연스레 해당 일화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 가운데 하나인 몽테뉴의 <수상록> 가운데 한 편인 "절름발이에 관하여"를 뒤적이게 되었다. 그 제목에서 가리키는 내용은 또다시 아랫도리 사정이고,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요즘 분위기에서는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위 구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몽테뉴는 허무맹랑한 속설이 퍼지는 것에 관해 고찰하다가, 어떤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와중에 '사실'의 유무보다는 '믿음'의 유무가 판단 기준으로 통용되는 세태를 꼬집는다. 즉 어떤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그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인데, 사실 이런 세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급부상한 탄핵 찬성 극우 세력의 사고방식이니, 자신들은 어떤 '사실'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부정 선거며 내란 혐의는 물론이고 헌법 재판 같은 사법 체계 전반에 대해서까지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니, 조만간 데카르트처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회의하게 되지는 않을지.


특히 어떤 '사실'에 대한 '증언'의 혼란에 관해서라면 굳이 마르탱 게르나 몽테뉴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탄핵 재판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최근에는 비상 계엄 상황에서 주고받은 단어가 '의원'이냐 '인원'이냐를 두고 법정 안팎에서 여러 사람이 설전까지 벌이는 판이라니, 지켜보는 국민 입장에서는 자괴감만 커진다.


현직 대통령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직후 욕설을 섞어서 막말을 내놓았다가, 뒤늦게 문제가 되자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 말했다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비상 계엄'도 '비싼데염'이란 혼잣말이 와전되었을 뿐이고, 사실 자기는 '대통령'이 아니라 '머통령'이라는 주장도 나올 만하겠다.


구체적인 맥락과 정황을 감안하면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명백한데도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지만, 비상 계엄과 내란 혐의는 단순히 모음 하나 차이로 뒤집을 수 없는 수준 아닌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단계는 지나갔으니 마지막 발버둥인 셈인데, 입을 열수록 부조리함만 더해간다.


'의원'인지 '인원'인지 어/아 구분이 그렇게 중요하면, 차라리 다음 대통령인지 머통령인지는 차라리 발음이 정확한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요즘 유행으로 봐서는 기껏 대통령 뽑아 놓았더니 프리랜서 선언하고 하차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테니 살짝 불안하지만, 그래도 기상캐스터 출신 정치인보다야 백 배 나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