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오 모토라는 작가에 주목하게 된 것은 <11인이 있다!>라는 단편집 때문이다. 표지화만 봤을 때에는 어쩐지 주인공 가운데 타다와 프롤 두 사람의 모습만 주목되어서, 대략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 같은 줄거리는 아닐까 지레짐작 했었는데, 막상 책을 펼쳐보니 의외로 SF 순정만화여서 깜짝 놀랐고, 읽고 보니 상당히 신선하고도 흥미로운 줄거리라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곧바로 하기오 모토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보았더니 <방문자>와 <토마의 심장>이라는 작품이 있어서 곧바로 구입해 읽어보았다. 아쉽게도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작품은 이미 절판되어서 결국 도서대여점에서 빌려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우울한 내용이었다. 야오이 계열의 만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불편한 데가 있었으니까. 미국 소년 제레미는 어머니 산드라가 영국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인 그레그와 재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기뻐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레그는 산드라보다 오히려 제레미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제레미는 그레그의 손길을 거부하지만, 이에 분격한 그레그가 결혼을 취소하자, 평소 심약한 성품이었던 산드라가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한다. 어머니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간주하던 제레미는 어쩔 수 없이 그레그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산드라의 재혼을 성사시킨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간 제레미는 점점 더 가혹하고 변태적으로 변하는 그레그의 성적 학대에서 벗어나려 고민하다가, 급기야 승용차의 브레이크를 고장 내서 그레그가 빗길에 교통사고를 일으켜 치명상을 입게 만든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산드라까지도 사망하자 제레미는 큰 충격을 받고 밤마다 그레그가 찾아오는 꿈을 꾸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제레미의 의붓형 이안은 부친의 사망에 뭔가 흑막이 있다는 생각에 조사를 거듭하다가 제레미가 진범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이안의 다그침에 제레미는 그레그와의 관계를 설명하지만, 이안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레미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이안은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서 제레미를 학대한 증거가 담긴 고문 도구며 사진을 보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이안은 사죄하러 미국에 연락을 취하지만, 제레미는 이미 거리에서 몸을 팔며 마약에 의존하는 처참한 신세로 추락해 있었다. 이안은 제레미를 구출해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죄책감과 모멸감에서 비롯된 제레미의 자기파괴적인 행동은 그칠 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안은 제레미에게 증오와 연민의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이상하게도 동성이며 근친(맞나?)인 그에게 끌리게 되어서 육체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노력한다.


어딘가 좀 무리한 줄거리는 아닐까 싶은데, 사실 주인공을 '제레미'가 아니라 '제인'으로 바꿔놓기만 해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닐 것도 같다. 가령 의부에게 강간당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의외라고 할 수 있어도, 의부에게 강간당하는 딸의 이야기는 오히려 일반적일 테니까.(그게 '정상'이란 건 아니고, 다만 더 '빈번'하다는 뜻). 이성간의 성폭행이 아니라 동성간의 성폭행을 묘사한 것이 의외로 충격을 완화시킨다는 점은 적잖이 아이러니컬한데, 어쩌면 야오이 장르를 여성 작가들이 선호하는 이유도 이런 충격 완화 효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강간 장면 묘사보다는 남자 강간 장면 묘사가 더 편하기(?) 때문이랄까.


내가 읽은 애장판은 일반 단행본보다 더 두꺼운 편이어서, 그걸로 모두 10권이나 되다 보니 상당한 분량이다. 대략 1-5권은 제레미의 범행과 이안의 진실 확인, 6-10권은 두 사람이 각자의 죄의식과 서로에 대한 감정을 추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반부의 팽팽한 줄거리에 비해 후반부는 적잖이 산만한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작품 전체로 보자면 범죄와 정화의 과정이 꽤나 섬세하게 그려졌다. 이야기에 대해 거부감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불평도 늘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후반부는 초현실주의 느낌의 그림으로 장식된 기나긴 엑소시즘이며,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제목이다. 책을 읽기 전부터 상당히 인상적인 제목이다 싶었는데, 본문에서 제레미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의 입을 통해서 그 출전이 무려 W. B. 예이츠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 다른 친구가 "그런 제목의 시를 쓴 거야?" 하고 묻자, 예이츠를 거론했던 친구가 곧바로 "아니, 다다이즘 어쩌구에서 한 말일걸"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책의 앞에 나와 있는 원제를 보면 After us the Savage God 이다. Savage God 은 "잔혹한 신"으로도 번역이 가능할 것 같은데, after us 를 "지배한다"로 번역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문득 생긴다. 어째서일까?


궁금한 생각에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마침 영문 위키피디아의 하기오 모토 항목에서 한 가지 의외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서는 이 만화의 제목을 A Cruel God Reigns 라고 직역해 두었는데, 그 제목은 예이츠가 아니라 다른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쓴 <잔인한 신: 자살의 연구>(Savage God: A Study of Suicide)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부제를 직역한 <자살의 연구>(최승자 옮김, 청하, 1982)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정말 오랜만에 책장에서 다시 꺼내 넘겨 보니, 예이츠가 했다는 그 말이 서문 앞에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등장한다.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

예이츠



테즈카틀리포카 신은 진짜 신으로 여겨졌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하늘이든 지상이든 사자들이 있는 곳이든 그 어디로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을 충동질시켜 싸우게 만들고 적의와 불화를 만들어내고 수없는 고뇌와 불안을 야기시켰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서로 적대시켜 전쟁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쌍방의 적'이라 불렸다.


그만이 세상이 어떻게 다스려지는가를 알았으며, 그만이 번영과 부를 갖다 주고, 그리고서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앗아갔다. 그는 부와 번영과 명성과 용기와 지배력과 위엄과 명예를 주고, 그리하여 자신이 뜻한 바대로 그것들을 도로 앗아갔다. 이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며 숭상했으니, 흥망성쇠가 그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 사하군, <누에바 에스파냐의 풍물사>



여기서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이 바로 After us the Savage God 의 번역이다. 청하 판본에서는 마치 예이츠가 그런 제목 아래에 베르나디도 데 사하군(남아메리카의 신화와 전설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한 에스파냐 출신의 수도사)의 책을 인용한 것 같은 형국이다. 하지만 구글에서 원문 확인을 해 보니,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인용문이다. 즉 예이츠가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이라는 구절을 제목으로 삼아 사하군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알바레즈가 자기 책의 서두에 예이츠와 사하군의 말을 나란히 인용한 셈이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배치되어야 정확할 것이다.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

-- 예이츠



테즈카틀리포카 신은 진짜 신으로 여겨졌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하늘이든 지상이든 사자들이 있는 곳이든 그 어디로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을 충동질시켜 싸우게 만들고 적의와 불화를 만들어내고 수없는 고뇌와 불안을 야기시켰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서로 적대시켜 전쟁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쌍방의 적'이라 불렸다.


그만이 세상이 어떻게 다스려지는가를 알았으며, 그만이 번영과 부를 갖다 주고, 그리고서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앗아갔다. 그는 부와 번영과 명성과 용기와 지배력과 위엄과 명예를 주고, 그리하여 자신이 뜻한 바대로 그것들을 도로 앗아갔다. 이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며 숭상했으니, 흥망성쇠가 그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 사하군, <누에바 에스파냐의 풍물사>

 



예이츠가 한 말의 본래 맥락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더 검색해 보니, 그가 1896년에 파리에서 알프레드 자리의 희곡 <위뷔 왕>의 개막 공연에 참석했다가, 작품의 파격적이고 논란적인 내용에 반발하는 관객들이 벌인 소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난 뒤에 한 말이라고 했다.(일부에서는 그가 이 말을 관람 직후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중에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따라서 이 말이 <위뷔 왕>을 관람한 바로 그날의 충격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알고 보니 그 말이 포함된 원래의 구절이 <자살의 연구>에도 다음과 같이 길게 인용되어 있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후, 폴 발레리 이후, 귀스타브 모로 이후, 퓌비 드 사반느 이후, 우리의 모든 미묘한 색채와 간결한 리듬들 이후, 그리고 내 자신의 시 이후, 콘더의 그 희미한 색조의 배합 이후, 더 이상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들 이후엔 잔인한 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216쪽)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잔인한 신"은 칭찬일까, 아니면 비난일까? 아무래도 구체적인 맥락을 확인하려면 그 원래 출전이라는 예이츠의 자서전을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존에서 원문 검색을 해 보니, 문제의 구절은 "베일의 떨림, 제4부: 비극적인 세대"라는 제목이 달린 장의 맨 마지막 단락에 등장했다.(구체적인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극 분야에 한정해서만이라도 예이츠의 예술관, 또는 연극 이론이나 비평을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마땅한 참고도서를 찾지는 못했다. 물론 예이츠가 쓴 단막극집은 번역본이 몇 가지 나와 있는 것으로 알지만).



나는 테아트르 드 뢰브르에서 있었던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의 첫 공연을 보러 갔다. 함께 간 라이머는 자전거 타는 복장을 한 소녀에게 무척이나 매력을 느낀 모양이었다. 관객은 서로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으며, 라이머는 내게 속삭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결투가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 그러면서 그는 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내게 설명해 주었다. 배우들은 인형, 장난감, 꼭두각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제는 마치 나무로 깎은 개구리처럼 모두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내가 보니 주연은 일종의 왕인 것 같았는데, 우리가 옷장을 청소하는 데 쓰는 것과 같은 종류의 솔을 마치 홀처럼 들고 있었다. [관객 중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패거리를 두둔하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연극을 지지한다는 고함을 질러 댔다. 하지만 그날 코르네유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무척이나 슬펐다. 왜냐하면 희극은, 객관성은, 그 증대하는 힘을 다시 한 번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후, 폴 발레리 이후, 귀스타브 모로 이후, 퓌비 드 샤반 이후, 우리 자신의 시 이후, 우리의 그 모든 섬세한 색깔과 불안한 리듬 이후, 콘더[오스트레일리아의 화가 /옮긴이]의 그 희미하게 혼합된 색조 이후, 더 이상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이다."(The Collected Works of W. B. Yeats, Vol. III, Autobiography, New York: Scribner, 1999, pp. 265-5.)



그렇다면 예이츠가 말한 the Savage God 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하기오 모토의 만화에서는 "잔혹한 신"으로, 알바레즈의 책에서는 "잔인한 신"으로 번역되었지만, 오히려 "야만스러운 신"이나 "미개한 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도 하다. 자서전의 구절처럼 예이츠는 비록 같은 예술가로서의 의무감에서 그 연극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위뷔 왕>을 보고 그 전복적인 내용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질서의 전복과 파격의 일상화라는 것이 그에게는 못내 찜찜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뒤늦게야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뿐이다"라고 자조적인 말을 남긴 셈이다.


이런 사실은 알베레즈의 책을 통해서도 짐작이 된다. 그는 예이츠의 "야만스러운 신"이라는 표현을 "자살과 문학"이라는 장에서도 "다다이즘"에 관한 맥락에서 인용한다. 즉 "모든 것을 파괴하자는 운동"(217쪽)으로 요약될 수 있는 다다이즘은 "이전보다 더욱 극단적이고 더욱 격렬하며, 그리고 마침내 더욱 자기파멸적 예술을 만들어내게 되었다"(216쪽)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예술이 "끊임없는 실험의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카오스 의식"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불안으로 인해서 "예술가는 낭만적 영웅이며 해방자가 아니라, 희생자이며 제물이 되어 버린 것"(232쪽)이라고 지적한다.


바로 여기서 "카오스 의식"은 "자살"과 연관된다. 20세기 이전에는 예술가가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예술가가 훌륭할수록 상처받기도 쉬운 것처럼 보인다"(230쪽)고 저자는 지적한다. 알바레즈의 책이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주장은 어딘가 묘한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의 서론은 저자가 플라스와의 만남에서 받은 몇 가지 인상을 토대로, 자살에 이르기 직전까지 그녀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는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은 심지어 자살에 관해서도 몇 번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도 한다.


내가 처음 알바레즈의 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실비아 플라스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뭔가 기대에 어긋난 부분도 없지 않다. 제목만 보면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역사나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설명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오히려 문학에 관한 내용이 많아서 조금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저자는 다다이즘을 비롯한 20세기의 예술 경향 배후에 있는 불안을 탐지하고, 그 불안이야말로 자살로 대표되는 예술가의 파멸의 원인이라고 진단하지만, 사실 플라스의 경우(역시나 자살 미수자인 저자 역시)에는 예술까지 갈 것도 없이, 단순히 개인적 기질이며 심리적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잔혹한 신"인지 "야만스러운 신"인지 간에, 예이츠의 발언과 하기오 모토의 작품, 또는 알바레즈의 책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예이츠의 발언과 알바레즈의 책이 맺은 관계는 위에서 이미 설명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자료와 하기오 모토의 만화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어딘가 좀 모호하다. 비록 예이츠의 발언이 대사 중에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원문인 After us the Savage God 이 아니라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残酷な神が支配する)라고 나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 이 만화의 영문 제목은 아예 A Cruel God Reigns 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저자는 과연 예이츠의 발언을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 


이 수수께끼는 문제의 인용문의 일본어 번역문을 보고 나서야 풀렸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하기오 모토의 팬페이지에 나온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의 인용문 모음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었다.(아아, 구글의 힘!) 즉 여기서는 알바레즈가 인용한 예이츠의 the Savage God 에 관한 구절이 일본어판 <자살의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ステファーヌ・マラルメのあとに、ポール・ヴァレリーのあとに、ギュスターヴ・モローのあとに、現代芸術の微妙な色彩といらだつリズムのあとに、コンダーの真珠光のような色のあとに、あと何が可能だろうか。やがて残酷な神が支配する



어딘가 좀 허무한 느낌이기도 한데... 결국 하기오 모토는 After us the Savage God 을 "머지않아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고 옮긴 위의 구절을 그대로 가져다가 제목으로 삼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이다"보다는 "머지않아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가 더 멋진 표현인지는 몰라도, 과연 충실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 논란의 책임은 하기오 모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어판 『自殺の研究』의 번역자(早乙女忠)에게 물어야 마땅할 것 같다. 물론 이 작품 내부에서도 "잔혹한 신"의 의미를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 가령 10권 말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보라.



제레미    어째서 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어째서 이런 인간으로. 아이를 부모한테 키우게 하면 안 돼. 

            왜냐면 부모는 아이를 사랑과 폭력으로 지배하니까! 그리고 아이는 폭력을 배우게 돼. 

            부모의 감정에 이끌려 지배당하고 저주에 걸려버려.


이안      저주?


제레미    아이는 무력하잖아? 생물로서 미숙하고 아무것도 못해서 부모에게 의존하며 자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부모 자신이 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그대로 아이에게 대물림해. 이게 저주가 아니면 뭐야?


이안      뭐, 그래... 부모도 인간이니 완벽할 순 없겠지...


제레미    부모는 아이에게 인간이 아닌 신이야! 그 신이 가르친다구. 사랑도 폭력도 고통도.


이안      그런가? 하지만... 난 언제나 어머니가 그리웠어.


제레미    버림받았어도?


이안      아이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잖아? 부모가 필요하지? 그리고 부모 또한 아이가 필요해.


제레미    희생양으로? 아이는 부모라는 신에게 제물이자, 부모의 인생에 공양으로써 존재해.


이안      Sacrifice... 문득 그 단어가 떠올랐다. 세상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어. 왜냐하면 신에게 공물이 바쳐졌으니까.

            그리고... 부모의 부모, 그리고 그 전 부모도 누군가의 자식이자 희생양이었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는 

            그레그의 세계에 바쳐진 공물.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는 제르미의 세계에 바쳐진. 신은 제물을 원하고 있어. 

            신의 세계 또한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으니까.



이 대목만 놓고 보면, 이 만화에서 이야기하는 the Savage God 은 "야만스러운 신"이라는 예이츠의 발언보다는 오히려 알바레즈의 책 서두에 인용된 사하군의 설명에 나오는 "잔혹한 신" 테즈카틀리포카에 대한 묘사에 더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레미에게 편의와 고통 모두를 제공해 주는 그레그를 의미하는 것도 같고, 또 어떤 의미에서 이는 자신의 안락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킨(적어도 제레미에게는 한때 그렇게 생각된다) 산드라를 의미하는 것도 같다. 여하간 하기오 모토가 말한 "잔혹한 신"이 예이츠가 말한 "야만스러운 신"과 무관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는 제목 자체는 오독의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자살의 연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 저자에게는 오히려 책임이 없다. 다만 알바레스의 일어판 번역자가 저 예이츠의 유명한 말을 다다이즘에 대한 평가라는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시켜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고 애초부터 과다하게 번역한 것이 원인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 구절이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이다"라고 직역되었더라면, 하기오 모토는 과연 거기서 자기 작품을 만들어 나갈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창의적 오독"의 또 한 가지 보기 드문 사례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 하기오 모토의 책은 <포의 일족>이 새로 간행되는 등, 이후에도 계속 나오고 있다. <방문자>와 <토마의 심장>은 아쉽게도 품절이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은 두 가지 번역본이 있지만, 아쉽게도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번역까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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