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라딘에서 <에티의 여름>이란 신간 번역 소설을 광고하면서 검색창에다가 밑도 끝도 없이 "출판 역사상 가장 비상식적인 계약" 운운해서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막상 책 소개 글을 보니 영국 <텔레그래프> 지의 기사 인용문이라는 해당 구절을 "비상식적일 정도로 과감한 계약 사례"라고 또 다르게 적어 놓았기에, 도대체 원문이 무엇이었나 궁금해졌다.


어설픈 나귀님이라 구글링을 해도 해당 구절의 원문까진 발견하지 못했지만, <텔레그래프>에 게재된 해당 저자 인터뷰 기사를 보니 "책 두 권에 여섯 자리 계약"이라고 나온다. 결국 책 두 권을 간행하는 조건으로 수백만 달러(수십억 원)의 선인세 계약을 했다는 뜻이다. 최근 들어서는 심지어 "일곱 자리 계약"(수백억 원)까지도 가능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기존 베스트셀러 저자라든지 연예계 스타처럼 이미 그 분야나 다른 분야에서의 활약으로 고정 독자를 확보한 경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반면, 기존 실적이 전무한 '신인'은 계약금 액수가 특히나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 언론 보도를 접한 독자로선 '출판사가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많은 돈을 줬나?' 하는 의문에 해당 도서를 실제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역대급 베스트셀러인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의 경우, 영국 판권은 겨우 '네 자리'인 2500파운드에 팔렸지만 미국 판권이 '여섯 자리'에 팔리면서 큰 화제가 되어 흥행에 시동을 걸게 되었다. 공포 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의 출세작 <캐리>도 초판 양장본이 아니라 재판 문고본 판권이 '여섯 자리'에 판매되어 화제가 되면서 인기에 불이 붙은 경우다.


그런데 출판계의 고액 계약금 사례 관련 내용을 구글링하다 보니, '존 디디온 에코백 만드는 회사'(?)인 리터러리허브의 편집자 에밀리 템플이 쓴 "일곱 자리 출판 선인세의 짧은 역사"라는 글이 나온다.[*] 2008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 출판계에서 나온 '여섯 자리'(수십 억대) 계약의 사례를 돌아본 내용인데, 살짝 오래 된 내용이긴 해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해당 기고문에서는 총19종의 사례를 거론하는데, 그중에는 판매와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양쪽 모두에서 폭망한 경우가 상당수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도 있고 아닌 책도 있는데, 번역서 중에는 10년도 못 채우고 절판된 것이 적지 않다. 결국 신인 작가의 고액 계약은 득보다 실이 많은 '도박'에 불과하다는 증거인 셈이려나.




2017 - Whitney Scharer, THE AGE OF LIGHT (100만 달러 이상)

-- 신인 작가. 13개사 경쟁. 국내 미간행


2017 - Kate Hope Day, IF, THEN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국내 미간행


2017 - Kristen Roupenian, YOU KNOW YOU WANT THIS (120만 달러) 

-- 신인 작가. 단편집. 국내 미간행


2015 - Nicole Krauss, FOREST DARK (400만 달러) 

-- 기성 작가. 단편집. 

-- <어두운 숲>(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2020)


2015 - Yaa Gyasi, HOMEGOING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출간 후 문학상 다수 수상.

-- <밤불의 딸들>(야 지야시 지음, 민승남 옮김, 열린책들, 2021)


2014 - Emma Cline, THE GIRLS (200만 달러) 

-- 신인 작가. 12개사 경쟁. 베스트셀러 등극.

-- <더 걸스>(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아르테, 2016, 절판)


2014 - Imbolo Mbue, BEHOLD THE DREAMERS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베스트셀러 등극 및 펜/포크너상 수상

--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임볼로 음붸 지음, 구원 옮김, 코호북스, 2023)


2014 - Stephanie Clifford, EVERYBODY RISE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출간 후 반응 미미.


2014 - Charles Frazier, VARINA (300만 달러)

-- 기성 작가.


2014 - Cynthia D'Aprix Sweeney, THE NEST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베스트셀러 등극.

-- <둥지>(신시아 다프리 스위니 지음, 조동섭 옮김, 열린책들, 2019, 절판)


2013 - Garth Risk Hallberg, CITY ON FIRE (200만 달러)

-- 신인 작가. 12개사 경쟁. 베스트셀러였지만 평가는 엇갈림.


2013 - B.J. Novak, ONE MORE THING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단편집. 9개사 경쟁.


2013 - Abraham Verghese, THE MARAMON CONVENTION (500만 달러)

-- 기성 작가. 두 번째 장편. 10년 뒤인 2023년에야 THE COVENANT OF WATER로 간행. 베스트셀러였지만 평가는 엇갈림


2012 - Jennifer Egan, MANHATTAN BEACH (100만 달러)

-- 기성 작가.

-- <맨해튼 비치>(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문학동네,2019, 절판)


2011 - Karen Thompson Walker, THE AGE OF MIRACLES (100만 달러)

-- 신인 작가. 베스트셀러 등극 및 호평 일색.

-- <기적의 세기>(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14, 절판)


2010 - Kiran Desai, THE LONLINESS OF SONIA AND SUNNY (250만 달러) 

-- 기성 작가. 15년 뒤인 2025년에야 간행되어 부커상 후보에 오름.


2009 - Yann Martel, BEATRICE AND VIRGIL (320만 달러)

-- 기성 작가. 베스트셀러 등극.

-- <20세기의 셔츠>(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2018)


2008 - Tom Wolfe, BACK TO BLOOD (700만 달러)

-- 기성 작가. 잠깐 베스트셀러였다가 폭망함.


2008 - Carlos Ruiz Zafón, THE ANGEL'S GAME (400만 달러)

-- 기성 작가.

-- <천사의 게임>(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문학동네, 2022)




결국 출판계도 영화계나 연예계나 스포츠계와 마찬가지여서, 사실상 뭐가 되고 안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감'만 가지고 도박을 건다고 봐야 하겠다. 아이돌 업계에서도 수십억에 달하는 초기 투자 비용을 회수 못하는 경우가 많고, 여자친구나 리센느처럼 '중소돌의 기적' 사례가 회자되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분야에서나 '깜깜이 투자'는 위험하다고 봐야 하려나.


이처럼 위험 부담이 크다 보니,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다 들먹여서 선전하는 것이 아닐까. 한때는 각종 해외 매체의 베스트셀러임을, 다음은 국내외 유명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포함되었음을, 심지어 이름조차 낯선 각종 문학상 수상 실적을 들먹이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는데, 정작 소설 자체의 재미나 가치보다는 외적 기준만을 속물적으로 들먹인 셈이었으니 우습다. 


이쯤 되면 머지않아 작가의 외모며, 취미와 특기며, 가족 및 대인 관계며, 이메일과 전화번호 같은 각종 개인 정보마저 판매에 활용되지는 않을까. 1990년대에는 한국 문학 분야에서 젊은 여성 작가의 얼굴을 광고에 큼직하게 내보내며 '외모 마케팅'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다고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런 작가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 못하니 그 허망함을 알 수 있다.


신인 작가에게 계약금을 많이 줬다는 사실이 마케팅에서 활용되는 현실이 더욱 한심한 까닭은, 어떤 집을 가리켜 '예쁜 집' 대신 '얼마짜리 집'이라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속물적인지를 전세계인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인 책에서 무척이나 강조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부동산에서도 집값 따지는 것이 가장 중요해졌으니, 책이라고 다를 것은 없는 걸까...



[*] Emily Temple, "A Brief History of Seven-Figure Book Advances", Literary Hub, May 8, 2018.

--- https://lithub.com/a-brief-history-of-seven-figure-book-advances/


[**] 나귀님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던 <에티의 여름>의 경우, 출간 후에 몇몇 매체에서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고, 몇몇 문학상도 수상하거나 후보로 올랐으며, 출간 직후인 2025년 여름에는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찾아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 정도의 성과를 가지고 "출판 역사상 가장 비상식적인 계약"인지 "비상식적일 정도로 과감한 계약 사례"인지가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살짝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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