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테뉴 전기 저자인 세라 베이크웰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뭔가 궁금해 클릭해 보니,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번역본을 출판사만 바꿔 재간행한 모양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리뷰며 페이퍼에 출판사를 향한 성토가 등장했기에 또 무슨 영문인가 살펴보니, 황당하게도 구판에는 멀쩡히 들어 있던 후주와 참고문헌을 신판에서 빼 버리고 인터넷 링크로 대체한 모양이다.
원서에 후주와 참고문헌이 있었다면 번역서에도 넣는 게 당연한데, 무려 출판사에서 이를 불필요한 군더더기 취급한 셈이니 한심스런 일이다.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을 가리켜 '왜 들어가야 하느냐?'고 묻는 셈이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당혹스럽다. 심지어 책값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출판사의 결정을 두둔하는 글도 올라와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인공지능 환각, 즉 사오정 답변의 원인부터가 정확한 출전을 찾아내고 종합하는 과정에서의 오류이니, 이것만 보아도 책에 붙어 있는 후주와 참고문헌 같은 출전 표시 장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논문이나 저술의 표절 시비 중 상당수가 출전 표시 미비로 촉발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니 구간 출판사를 비롯해 학계와 출판계 모두가 준수하던 규약을 굳이 거스르려 작정한 신간 출판사의 행태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지를 보여준 증거라 할 만하다. 아울러 그러한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되었을 신통찮은 행동이 책의 내용까지도 훼손했을 가능성 역시 의심해 볼 만하다. 당장 이번 신간의 첫 페이지 첫 문단부터 오역이 등장하니까.
"그보다 더 이전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희롱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놀이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던 구약성서의 전도서나 욥기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11쪽) 여기서의 문제는 "하느님이 인간을 희롱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놀이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던"이란 구절(오역)이 "전도서나 욥기" 모두가 아니라 <욥기>의 주인공 "욥"만을 수식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즉 원문대로 정확히 옮기자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실존주의의 기원은 더 이전인 19세기의 소설가, 더 이전의 파스칼, 더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그보다 더 이전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지쳐버린 전도자며 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욥은 하느님이 자신을 갖고 노는 것에 대해서 감히 의문을 제기했다가 윽박지름을 당하고는 굴복한 인물이다."
여기서 첫 번째 오역은 바로 앞에서 소설가,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인물'을 연이어 거론했는데도 원문의 인명 '전도자'와 '욥'을 서명 <전도서>와 <욥기>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오역은 욥에 대한 설명이자 <욥기>의 내용(하느님과 악마의 내기 때문에 억울한 고통을 받았던 욥이 항변하지만 하느님의 으름장에 깨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오역은 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구판에서는 "전도서의 욥"이라고 추가 오역한 대목을 신판에서는 "전도서와 욥기"라고 나름대로 수정씩이나 가했지만, 그런 수정조차도 여전히 오역임은 모르고서 내버려둔 셈이다. 구판의 오역을 수정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셈이니, 아직 미확인된 오역이 신판 곳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인터넷이 처음 도입된 사반세기 전에도 이처럼 부피와 가격만 늘리는 듯 보이던 도판과 후주와 참고문헌과 색인 등을 인터넷 링크며 씨디롬 부록으로 대체하려 시도했던 출판사가 일부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조치가 본격적인 대세나 유행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서 안 하는 거라 봐야 맞겠다.
사실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자체로 완결된 상태라서 전기나 통신이 없어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니, 이제 와서 굳이 그 내용 일부를 인터넷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씨디롬 드라이브 자체도 사라져 버렸고, 인터넷도 영원하지는 않아 불과 몇 년 만에 소멸한 링크며 사이트가 허다하니, 한 번 만들면 50년씩 100년씩 가는 종이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후주와 참고문헌을 링크로 대체하자고 제안한 편집자는 ("이달의 우수사원" 밈처럼) 25년 전에 남들이 시도했다 포기한 것을 뭔가 대단한 아이디어인 듯 떠올리고 으스댔을 수도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사실 후주와 참고문헌과 색인의 유용성은 그걸 실제로 써 본 사람만 안다. 결국 저 출판사에는 책을 속속들이 활용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다.
[*] 근래에 접한 몇 가지 다른 사례(이른바 "처녀성을 떠맡은 자"와 엉터리 세네카 번역본)와 함께 출판계의 망조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 한 마디 꼬집어 주려고 기껏 글을 써서 다시 들어와 보니, 출판사에서도 논란을 의식했는지 하룻밤 사이에 책을 일시 품절시키고 새로 제작해서 몇 주 뒤에 재유통시킬 계획이라 한다. 십중팔구 이미 간행된 책을 재단해서 표지를 제거한 다음, 기존 본문에 앞서 누락되었던 부록을 추가하고 새로 제작한 표지를 씌워 다시 제본하지 않을까.(문제는 이렇게 되면 책 크기가 원래보다 사방 몇 밀리미터씩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에 잘 안 팔리는 책을 몇 년 뒤에 '표지갈이' 해서 재간행한 경우가 그러했다). 이와 유사한 논란이 있어도 엉터리 책을 끝까지 고수하는 악덕 출판사도 많았음을 감안하면 해당 출판사의 신속한 조치는 대단한 결단이지만 (물론 애초에 무개념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애초부터 오역이 있는 책이니 과연 이번 조치로 문제가 다 해결될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