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읽다 말고 놓아둔 박완서의 에세이집 <호미>를 오랜만에 뒤적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언젠가 저자가 설비 수리를 하러 온 나이 지긋한 목수에게 뭘 물어보니 '당근'이라는 답변이 나오더란다. 무슨 말인가 싶어 한참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러워하다가, 뒤늦게야 '당근'이 '당연'을 뜻하는 유행어임을 깨닫고는 머쓱해졌다는 것이다.


기존 '박완서의 굴욕' 시리즈(컴퓨터가 바이러스 걸렸다기에 옆에 있던 디스켓을 멀리 치웠더니, 수리기사가 한심하게 쳐다보더란 이야기도 그중 하나)의 연장인 셈인데, 저자도 겸연쩍은 듯 이렇게 덧붙인다. "별로 유행을 탈 것 같지 않은 연령층과 직업인에게까지 당근이 당연으로 일반화됐다는 걸 느끼면서, 그럼 정작 당근은 뭐가 되나 걱정이 됐다."(121쪽)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공감 가는 구절이었는데, 왜냐하면 최근의 '무섭노' 논란을 비롯해서 일베 용어 사용 논란이 대두할 때마다 이와 비슷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과연 어디까지 일상 용어를 잠식당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일베 용어가 특정될 때마다 금기어로 간주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일상어의 범위만 쪼그라들지 않겠냐는 것이다.


노무현을 비롯한 각종 표적에 대한 조롱과 합성에서 드러난 일베의 역량은 창작이 아니라 변형이다. 이른바 일베 용어도 기존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통용하는 것뿐이니, 일베 용어를 배제한다며 해당 단어를 배제하고 논란이 되는 표현들을 적극 기피하게 된다면, 결국에 가서는 일상어를 모조리 일베의 전유물로 순순히 넘겨주고 마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심지어 일베와는 무관한 나귀님조차도 공연히 오해를 받지 않으려 '노무'와 '운지' 같은 일베 용어를 기억하고, 생경한 신조어를 접할 때마다 그 출처가 무엇인지 일단 검색부터 해 보는 판이니, 이번 '무섭노' 논란 역시 역설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일베 용어 학습 기회를 제공했다고 봐야 할 법하다. 일베로선 최초 문제 제기자에게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이번 논란에서 드러났듯, 어떤 표현이 일베 용어인지 판정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니, 자칫 일베 비판이 마녀사냥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었다. 물론 나귀님이 보기에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평소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자처하던 조국 같은 사람조차도 마녀사냥을 거들고 나섰다는 점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박완서의 걱정이 아직까지는 기우라는 점이다. '당근'이야 여전히 '당연'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근'의 원래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당근'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봐야 할 테지만, 이 경우는 '당연'에 부정적 의미가 없어서일 뿐, 일베 용어처럼 부정적 의미가 깃들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수 있다.


그런데 박완서의 뜬금없는 당근 걱정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근'은 남녀 관계에서 중요한 키워드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당근, 당근"은 여성을 바짝 흥분시키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자칫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막무가내로 달려들 수 있으니 남성도 조심해야 하고, 특히나 주변에 납작하고 단단한 물건이 없게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할 정도이다.


물론 요즘 분위기만 보면 저 마법의 암호 "당근, 당근"도 여차 하면 학폭에 일진으로 처벌받기에 딱이니, '당근'이 '당연'으로 대체된 것도 그런 분위기의 반영은 아닐까 싶다. 같은 시기에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급감했으며, 입양아 학대와 교권 추락도 종종 벌어졌으니, 박완서의 뜬금없는 당근 걱정도 혹시 시대를 꿰뚫어 본 통찰이었을까...



[*] 그나저나 '거제야호'부터 '무섭노'까지 최근 연이어 나라를 뒤흔든 화제의 시발점은 번번이 리센느이니, 이번 정부의 향후 최대 과제는 주가 안정과 부동산 공급과 더불어 저 걸그룹의 입단속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최근의 국정 기조를 감안하면 결과적으로는 BTS나 블랙핑크 같은 초인기 아이돌에 대한 활동 일수 규제니, 호남 출신 신인 걸그룹 육성이니, 차트 순위 2배 반영 아이돌 굿즈 발매처럼 영 뚱딴지 같은 대책만 줄줄이 나올 것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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