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에 삼성 이재용이 자사에서 오래 일하다 사망한 환경미화원을 조문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한 요란한 행차가 아니라, 일행 없이 혼자 조용히 방문해서 유족을 만나고 장례비까지 사비로 지원했다니, 가뜩이나 반도체 호황과 주가 급등으로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집중되는 재벌 총수로서는 의외의 행동에 훈훈한 미담이라 여겨진 듯하다.
이전에도 커피를 선물한 알바생에게 몇 배로 사례하고, 떡볶이와 오뎅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등 소탈하고도 너그러운 면모가 부각되는 것을 보면, 은둔형에 카리스마적 경영자였던 부친과 달리 친근한 이미지로의 전환이 유용함을 깨달은 모양이다. 어쩌면 여러 해 동안 재판과 투옥을 경험하면서, 내심은 몰라도 외양만큼은 변화가 필요함을 실감한 까닭은 아니려나.
심지어 이재용의 '메르스 사과문'은 진심 어린 사과문의 모범으로 간주되어, 최근의 정용진처럼 누군가가 미진한 사과를 내놓을 때마다 비교 대상으로 언급될 정도이다. 마침 반도체 호황과 주가 급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서, 설령 카리나가 전화를 걸어 오더라도 차단하고 이재용을 만나러 가겠다는 사람이 대다수일 듯하니, 본인이나 회사나 인기가 최고조이다.
이재용에 대한 여론이 항상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반도체 생산과 기술 개발에 대담하게 뛰어들었던 부친 이건희의 결단이 혜안으로 평가되는 반면, 편법 상속 논란까지 불사하며 모든 것을 물려받고도 손 대는 것마다 헛발질만 계속하다 뇌물 공여로 감옥 신세까지 졌던 아들 이재용이야말로 이른바 '호부견자'의 대표적인 사레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삼성에 적대적이었던 여론이며, 심지어 삼성이 조만간 망할 것이라는 악담이 팽배했었다. 특히 거액을 투자했어도 대만에 밀리고 중국에 밀리는 반도체 사업이 장차 삼성의 아킬레스건이 되리라는 예측마저 나왔는데, 지금은 역대급 실적을 갱신하고 노조가 요구하는 억대 성과급도 선뜻 내놓으면서 모두가 '삼전닉스'만 바라보게 되었다.
주식이건 뭐건 '삼성 반도체'와는 아무 연관 없는 나귀님이지만, 여전히 그 이름을 들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백혈병 사망자' 사건이다. 회사에서 우수한 고졸 사원을 선발해 공장에 보냈는데, 알고 보니 발암 물질 가득한 반도체 제작 시설에서 특수 약품으로 청소하는 것이 업무였다나. 급기야 해당 업무를 맡은 직원 중 백혈병 환자가 이상하게 늘어났다.
피해자와 유가족이 소송을 제기하며 잠시나마 관심이 일었지만, 삼성전자와 정부 모두의 외면 속에 해결이 지지부진하다가 10여 년 뒤에야 사측이 사과와 보상을 내놓았다고 전해들었다. 이른바 '세계 일류'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그럴싸한 구호를 내걸었던 재계 1위 대기업에서 드러내는 매몰차고도 비인간적인 면모에 당시 크게 공분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삼스레 이 사건에 대해 환기하게 된 계기는 며칠 전에 무슨 책을 찾으려고 바깥양반 책장을 뒤지다가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많은 바깥양반이니, 그때에도 '저쪽' 운동 하는 친구들의 요청으로 관련 행사에도 참석하고 책도 얻어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당시에 삼성전자의 태도는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고압적이었다. 반도체 호황으로 억대 성과급을 노조에 선뜻 내주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울러 알바생과 환경미화원에게도 너그럽고 호감인 이미지를 쌓아올린 이재용의 행보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때는 호황도 아니었고 이재용이 전권을 장악하지도 않았다는 변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백혈병 사태 당시에도 메르스 사태 때에 나온 것과 같은 사과문이 나왔어야 맞지 않았을까? 20년간 근무하다 사망한 환경미화원의 빈소를 방문했듯이 진정한 추모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물론 백혈병 사태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삼성은 공익 기금 수백억을 내놓았다니, 사태는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뭔가 미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20년 전 일을 이제 와서 다시 꺼내 삼성을 욕하고 불매하고 주가도 폭락시키자는 건 아니다. 다만 백혈병 사태며 비자금 조성을 비롯해 삼성의 여러 가지 '덩치에 걸맞지 않은' 야비한 행동을 여지껏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선 최근의 '삼전닉스' 열풍에, 심지어 이재용의 개인적 인기까지 지켜보면서 여러 모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툭하면 일본을 향해 '용서는 하되 기억도 하자'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용서보다 기억이 앞서는 듯하다. 반면 삼성에 대해서는 기억보다 용서가 더 앞서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 '좌파 코스프레'를 좋아해서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알라딘이 다른 신용카드는 모조리 물리치고 유독 삼성카드에만 각종 혜택을 쏟아 부으며 광고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