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 중에 로런스 스턴의 <감성 여행>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같은 저자의 대표작 <트리스트럼 샌디>야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어느새 번역서가 무려 3종이나 중복 간행되어 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지만, 어쨌거나 후속편이자 미완성작이기 때문에 비교적 주목도 덜 받는 <감성 여행>까지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조차 안 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트리스트럼 샌디>의 번역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소설 이론서를 뒤적일 때마다 파격적인 구성과 서사의 대표 사례로 언급되기에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브리태니커 그레이트북스의 영어판을 어찌어찌 한 권 얻어 놓고도 과연 어디서부터 파먹어 들어가야 할지 막막한 느낌에, 한동안 갖고만 있다가 문지 번역본을 구하고서야 처분했나 그랬다.
쉽게 말해 '라떼는' 제목만 들어 보았을 뿐, 번역서는 고사하고 원서를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고전이 즐비했는데, 지금은 <톰 존스>며 <숫코양이 무어>며 하다못해 <소돔 120일>도 번역본이 여러 종이니 그저 격세지감일 뿐이다. 비록 완간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듯한 상황이기는 해도 <마하바라타>조차 원문 완역이 진행 중이니 정말 세상 참 좋아졌구나 싶다.
예전에 바깥양반이 주로 술자리에서 만나 친해진 철학과 교수님의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는데, 하루는 이분이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요놈들아, 이렇게 좋은 책을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인데, 왜 공부들을 열심히 안 하느냐'면서, 당신이 출근길에 교보문고 들러서 사온 책 한 권을 보여주시는데, 바로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 영역본이었다 한다.
그래서 바깥양반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궁금하기에 집에 오는 길에 교보문고 들러서 바로 그 책을 사왔는데, 어차피 자기 전공도 아니니 금세 관심을 잃어버렸다. 나귀님도 그간 발췌문만 접했을 뿐 비록 영역본이라도 전문은 구경도 못한 상태라 반가웠지만, 역시나 당장 긴요한 내용은 아니니 언젠가 읽어보려고 쌓아만 두었다가 세월만 흘러 먼지만 쌓였다.
지금은 <유일자와 그 소유>도 번역서가 2종이나 나왔고, 심지어 출간 당시의 논쟁에 대해서 저자가 직접 반박한 책까지 번역되었다니 또다시 격세지감이다. 대중적 글쓰기나 오만 데 나서기보다는 본인 전공 분야의 공부와 집필에만 전념하던 저 교수님도 정년 퇴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전해 들었으니, 새삼스레 인생이란 참 짧고 허무하구나 싶다.
그나저나 로런스 스턴의 대표작 <트리스트럼 샌디>와 <감성 여행>이 모두 번역되었으니, 그렇다면 이제는 저 이상한 그림책도 다시 한 번 꺼내 펼쳐볼 만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그림책'은 에디시옹 장물랭에서 나온 <끝없는 여행>으로, <골리앗>과 <카프카와 함께 빵을>처럼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만화를 그린 톰 골드의 작품이다.
이 책은 형식부터 파격적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코덱스 형태가 아니라 낱장 카드 여러 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귀님은 알라딘 중고샵에서 저자 이름만 보고 무작정 주문했었는데, 별다른 사전 정보가 없었던 상태이다 보니 실물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상자를 열자마자 무슨 연필 케이스 같은 것이 나와서 '사은품인가' 싶었는데, 그게 바로 그림책이었다!
알라딘 서지정보에는 엉뚱하게도 가로세로 길이가 "165x840밀리"라고 잘못 나왔는데, 실제로는 일반적인 책갈피보다 살짝 넓은 가로 7센티에 세로 16.5센티의 카드 12장이 종이 상자에 들어 있다. 카드마다 앞뒤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딱히 순서라고는 없고 좌우에 어떤 카드를 놓더라도 배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진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에 발명된 이런 카드식 그림책을 '미리오마라'라고 하는데, 번역하자면 "수천 개의 풍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톰 골드의 <끝없는 여행>의 경우, 카드 12장 앞뒤로 24개의 장면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배열에 따라 무려 "479,001,600종"의 조합이 가능하다고 한다.(정확한 숫자인지는 나귀님도 직접 계산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형식도 특이하지만 내용은 더 특이한데, 왜냐하면 카드에 묘사된 장면이 로런스 스턴의 소설 속 내용이라기 때문이다. 제목에 "여행"에 들어간 까닭이었는지, 나귀님은 <끝없는 여행>이 <감성 여행>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가보다 착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살펴보니 <트리스트럼 샌디>를 비롯해서 스턴의 작품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망라한 것이라 한다.
톰 골드가 저 소설가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 연구 단체인 '로런스 스턴 협회'에 먼저 연락해서 이런 책을 만들자 제안했다는데, 파격과 실험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다니는 소설가임을 감안하자면 딱 어울리는 헌정품 같기도 하다. 다만 애초부터 스턴을 좋아하는 독자를 겨냥해 만든 물건이다 보니, 그냥 톰 골드가 좋아 이것까지 산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을 법하다.
나귀님조차도 구입 당시에는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은 지 워낙 오래이다 보니, 카드 속 장면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소설뿐만 아니라 스턴의 작품 전반에서 가져온 내용이라고 하니, 십중팔구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감성 여행>이나 다른 저술의 장면도 섞여 있다고 치면, 어쩌면 영영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일단 이처럼 파격적인 내용과 형식의 책을 굳이 번역해서 나귀님의 '괴작' 컬렉션에 또 한 권 더해준 에디시옹 장물랭의 용기와 노력만큼은 칭찬하면서도, '이건 뭐, 갖고만 있지 이해는 불가능한 책 아닌가' 싶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감성 여행>도 번역되었다 하니 이참에 스턴을 다시 읽고서 <끝없는 여행>도 다시 꺼내보아야 하나 싶은 것이다.
톰 골드 역시 파격과 신선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만화가인데, 아쉽게도 절판된 <골리앗>과 <달과 경찰> 같은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고독 묘사가 훌륭했다고 기억한다. <카프카와 함께 빵을>과 <24카툰>에서는 뛰어난 재치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새만화책>에 수록되었던 "왕국의 파수병들"처럼 단행본에 없는 인상적인 작품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