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W. 캠벨(1910-1971)은 이른바 SF의 황금시대인 1930-40년대를 주름잡은 미국 잡지 <어스타운딩>의 편집자로 유명하다. 그 분야의 3대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에다가 '작가들의 작가'인 시오도어 스터전까지 모두 발굴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아도 그 뛰어난 눈썰미며 폭넓은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나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그는 SF 창작도 병행했는데, 이중에서는 중편 "거기 누구냐?"가 가장 유명하다. 남극의 연구 기지에서 얼음에 파묻힌 외계인을 발굴하는데, 죽은 줄 알았던 시체가 부활해 날뛰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물과 인간으로 의태하여 정체를 숨기는 바람에 대원들 사이에 의심과 불신이 급속히 퍼지며 외부 공격은 물론이고 내부 갈등까지도 겪는다는 이야기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공포를 반영했다고 평가되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와도 유사한 줄거리인데, 캠벨의 중편은 정작 저 반공주의 광풍보다 10여 년이나 먼저 비슷한 상황을 묘사했으니 이래저래 흥미로운 일이다. <바디 스내처>와 "거기 누구냐?" 모두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오래도록 인기를 누린 요인도 외계인보다 인간 갈등 묘사가 탁월한 까닭은 아닐까.


캠벨의 중편에서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외계인의 부활 앞에서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정신줄을 놓아 버린 생물학자이다. 횡설수설 해대는 그를 딱하게 여긴 동료들이 일단 창고에 감금하는데, 나중에 다시 가 보니 광증은 연기일 뿐이고 이미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했고, 지구에는 없는 기술을 이용해 생전 처음 보는 기기며 무기며를 잔뜩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우주선 비이글 호>에서도 엄청난 무력과 뛰어난 두뇌를 지닌 외계인을 멍청한 지구인이 우주선에 들이는 바람에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는데, 가까스로 외계인을 제거하고 보니 짧은 시간인데도 비범한 사제 무기를 만들었기에 지구인이 기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을 납치해서 자기 알을 심어놓는 그 외계인은 훗날 영화 <에일리언>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그나저나 새삼스레 캠벨의 소설을 다시 꺼내 읽은 까닭은 얼마 전 뉴스에서 한국 남극 기지의 흉기 난동 사건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대원들 간에 시비가 붙어서 당사자 두 사람을 다른 구역에 격리해 놓았다는데, 그중 한 명이 작업장에서 기계를 이용해 흉기를 제작해서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십중팔구 철판을 자르고 다듬어 만든 사제칼이 아니었을까.


비록 반중력장치나 광선총까지는 아니지만, 남극에서의 무기 제작이라 하니 캠벨의 소설 내용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남극 체류 경험자의 수기를 보면, 장기간 고립 상태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정신 건강의 양호함은 물론이고 대인 관계의 원만함도 필수 조건이라 했는데, 어쩌다 저 소설 내용에 버금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던 건지 모르겠다.


나귀님이 본 책 중에서는 <얼음에 갇히다>라는 논픽션이 남극 기지의 생활상을 가장 자세하고 흥미롭게 묘사했던 것 같다. 중년 여성 의사가 남극 기지 근무를 자처해 난생 처음 월동에 들어가는데, 불운하게도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원격 진료와 자체 수술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환자라서 향후 남극 체류를 금지당한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남극에서는 물자가 귀해서 사소한 물건도 내버리지 않고 재활용과 재재활용을 거치며, 주요 시설도 오래 되어 툭하면 고장 나기 때문에 불편 감내와 고통 분담은 선택 아닌 필수였다 한다. 대신 콜라에 만년설을 얹어 마시기, 사우나에서 나오자마자 남극의 눈밭에서 달리기 하고 들어가기 등 오로지 그곳에서만 가능한 보상도 있었다.


지난번 어느 방송국에서 예능 촬영을 한답시고 남극 기지에 찾아갔다가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축내는 등 공연히 민폐만 끼치고 돌아왔다며 비판 여론이 일었는데, 이번에는 칼부림까지 일어날 뻔했다니 이래저래 수난의 남극 기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 비슷한 폭력이 전부터 비일비재했다는 지적도 있으니, 어쩌면 그것도 '한국형' 부조리의 연장일까.


그나저나 남극 최초의 칼부림 기록은 의외로 한국이 아니라 2018년에 러시아가 먼저 세웠다고 한다. 그 이유도 황당한데, 아직 읽지 않은 책의 결말을 동료가 먼저 이야기하는 바람에 빡친 사람이 칼을 휘둘렀다던가. 뭐, '스포일러라면 그럴 수도'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결국 나귀님도 이 글 한 편에 스포일러를 여럿 넣어버린 셈이니 살짝 뜨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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