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글 못 쓰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로도 선정되었다던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기에 궁금해서 미리보기를 클릭해 보았다. 나귀님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의 연속이지만, 그나마 눈에 익은 고유명사가 등장한 몇 구절을 구글북스 원문과 대조해 보았더니 역시나 오역이었다. 공짜 알바를 할 의향은 없으니 하나만 지적하자.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의 의미이며, 이때 '떠맡겨진다는 것'은 '처녀성을 떠맡은 자'라는 말에서와 같이 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29쪽) 역주에는 "'처녀성을 떠맡은 자', 즉 '성모[동정녀] 마리아'는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을 번역한 것이며, 이는 뒤이은 말인 "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와 의미상 연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오역이다.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은 "성모 승천"이라는 뜻이니까. 즉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가톨릭 전승을 말하며, 신성을 지닌 예수의 '자력 승천'(ascension)과 달리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인간이 하느님에게 "들려올라갔다"고 하는 '타력 승천'(assumption)이라 몽소승천(蒙召昇天), 피승천(被昇天)이라고도 한다.
버틀러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고, 책에서 젠더/성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virgin = 처녀(성)"라고 번역자의 생각 자체가 굳어버린 탓일까? 하지만 원래의 문맥에서 버틀러의 발언 맥락은 "처녀성을 떠맡은 자"가 아니라 "성모 승천"일 뿐이다. 즉 그 대목에서 연거푸 나오는 영어 단어 assumption의 여러 뜻 중에 "승천"도 있다고 덧붙인 것뿐이다.
즉 제대로 옮기면 이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assumption)의 의미인데, 이때 '떠맡겨진다'(assumed)에는 "성모 승천"(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의 사례에서처럼 더 고양된 영역으로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 결국 번역자/편집자/감수자 중 누구 하나도 가톨릭을 몰라서 벌어진 실수이고, 역주 7도 그런 무지를 변명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을 뿐이다.
이건 "식자우환"의 사례일 수도 있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엘리아데 대담집을 번역하면서 "바흐"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더 유명한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대신 덜 유명한 종교학자 "요아힘 바흐"라고 오역했고, 또 교수 둘이 공역한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에서 "라이너스의 담요"가 나오자 "노벨상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의 담요"라고 오역했듯 말이다.
또는 앤 카슨의 책에서 토라를 "narrow sex"에 비유한 표현이 나오자 "좁은 음문" 대신 "한정된 교미"라는 번역어가 나온 것과도 유사하다고 해야 하겠다. 쉽게 말해 '에이 설마 그거겠어?' 하는 생각에 뭔가 그럴싸한 해석을 복잡하게 고안해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설마 그거'가 정답이었던 거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쉬운 답을 놓친 격이라 할까.
문제는 책 자체가 워낙 아리까리한 내용이다 보니, 독자는 오역조차 모르고 넘어가 버린다는 거다. 피천득의 저서에서 '에어리엘'이란 단어를 샘터 편집부가 '에머리엘'로 오입력하자, 저자의 제자인 한 교수가 이걸 또 의미심장한 뜻으로 굳이 해석하는 글을 썼던 것처럼, 저자의 권위가 높다 보면 독자 역시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여 오역과 오타조차 맞다고 여긴다.
버틀러의 이번 신간에서는 오역을 저질러놓고 무슨 뜻인지 다시 검토하긴커녕, 문맥과 동떨어진 역주를 길게 달아서 '꿈보다 해몽'을 도모한 번역자의 태도를 비판할 만하다. 이해가 안 되면 혹시 내가 잘못 옮겼는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살펴봐야지, 말이 안 되게 번역해놓고 그걸 말 되게 한답시고 역시나 말이 안 되는 역주를 달아놓는 게 말이 되는가!
나귀님이 주디스 버틀러 같은 현대 철학자들을 불신하는 까닭은 그 논의 자체가 이렇게 번역조차 어려울 만큼 각자의 모국어에 '속박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나 프랑스어와 호환되지 않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리 정교한 논의라도 번역이라는 검증을 견뎌내지 못할 만큼 허약한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래도 다들 떠받드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있나보다 싶어서 알아보려 해도 막상 나오는 책마다 오역본이니, 설령 '모든 것의 이론'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자기는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도 역시 모호할 따름이니, 결국 다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야바위판인가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간행된 버틀러의 번역서는 하나같이 오역 논란이 따라붙었으니, 이쯤 되면 이 저자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오역을 "떠맡는"(assumed) 운명이라도 된 듯하다. 그렇다면 오역을 지적하는 비판자들은 저 난해한 문장을 제대로 옮길 수 있는가? 아무래도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이번에 나온 책 역시 북펀드 단계부터 '새롭고 정확한 번역'을 장담했었으니까.
원문 자체도 이해하기 힘든데, 번역자도 제대로 이해 못한 것을 독자더러 이해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과연 번역자는 "성모 승천"을 "처녀성을 떠맡은 자"로 옮기면서 말이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참고로 구판에서는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진 동정녀 마리아"라고 옮겼다. 구판도 오역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쯤 되면 신판 역시 믿을 수 없는 수준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