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우주점에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의 구판본이 있기에 구입했다. 흔치 않은 절판본이지만 최근에 신판도 나와 희귀본 대접까지는 받지 못한 까닭인지, 어영부영 요령 없는 나귀님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희한한 일이다. 딱히 애호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이면 하나씩 구입하다 보니 구판 전집을 하나 빼고 다 모으게 되었다.

 

고려원의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전집"은 전24권(마지막 권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오에 겐자부로론>으로 예정되었으니, 오에의 저서는 총23권뿐이다)으로 추진되었지만,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전체의 5분의 3인 열다섯 권만 간행하고 출판사 부도로 중단되었는데, 간행 개시 시점에서 최신작 위주로 간행하다 보니 대부분 뒷번호의 중후기 작품 위주로만 나왔다.


그나마도 출판사가 있던 시절에는 교보문고 등에서 할인 행사를 해도 '완간되면 한꺼번에 사자'고 외면했고, 출판사가 망하고 나서는 헌책방에 워낙 많이 굴러다니기에 '천천히 사도 되겠지' 싶어서 무시했는데, 뒤늦게야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싶어 찾아보니, 그 많던 책이 다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라 아차 싶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오히려 그 사이에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나 대담집을 짬짬이 구해 읽으면서도 소설을 외면했던 까닭은 뭔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특유의 현학적 내용이 거슬렸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른바 '백치 아들 서사'를 중심으로 한 사소설이 반복되는 듯해서 본인의 '사연팔이' 이외에 작가의 능력이 있는지도 살짝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백치 아들 서사'라는 표현은 오에 겐자부로와 히카리 부자를 다룬 린즐리 캐머런의 논픽션 <빛의 음악>에서 처음 접했는데, 저 소설가를 연구하는 비평가 사이에서는 종종 통용되는 듯하다. 십중팔구 자폐증이면서도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작곡가로도 활동했던 히카리가 이른바 "백치 석학"(idiot savant), 흔히 말하는 "서번트"임에 착안한 표현이 아닐까.


이번에 구입한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도 외관상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지만, 내용 중에 역시나 '백치 아들 서사'를 포함한 저자의 실제 체험과 작품 활동 관련 일화가 등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전적인 내용이 아닐까 싶은 인상을 주게 된다. 현학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여서 수시로 각종 작품과 인명과 이론이 언급되어 뭔가 정신사나운 느낌마저 없지 않다.


물론 사소설이나 자전소설도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므로, 이를 수기나 자서전과 혼동하면 곤란할 것이다. 오에 역시 자신의 작품 속 내용을 독자와 언론이 실제 사실로 혼동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낸 적이 여러 번이라고도 전한다. 하지만 애초에 본인과 저서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디까지나 허구'라고 강조하는 셈이니 설득력은 떨어진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장애아를 둔 진보 성향의 전업 작가'인 주인공이 거듭 등장하고, 에세이에서도 본인의 주장보다는 독서나 교유에서 얻은 바를 옮겨서 말하는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과연 이 작가에게는 독창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어찌 보면 가족사의 비극과 그 극복 노력이라는 특징이 과대평가된 것은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구입하면서 내친 김에 이전에 구입한 그의 초기작까지 꺼내 일별해 보니, 초기의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알던 모습과 상당히 '다른' 작가임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물론 여기서도 '아이의 눈으로 본 폭력과 부조리의 세상'이라는 주제가 반복되기는 하지만, 이후의 현학성과 상반되는 상당히 거칠고 사나운 느낌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오에 겐자부로>의 제1부 "초기 단편"에 수록된 "기묘한 아르바이트", "사자의 잘난 척", "남의 다리", "사육", "인간 양", "돌연한 벙어리", "세븐틴", "공중 괴물 아구이"와 문지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첫 장편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이다. 고려원 전집에서는 1-3권으로 예정되었지만 간행 불발된 작품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 중 맨 처음 읽은 것이 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 전집에 수록된 중편 "성적 인간"이었다. 이른바 '취미로 치한을 하는 사람'인 청년과 중년이 그 업계(?)에 첫 발을 담근 소년을 만나 가르침을 베푼다는 상당히 기괴한 내용이다 보니, 나중에 바로 그 작가가 무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처음 읽은 작품의 대담함과 의외성이 마음에 들어 중후기 장편도 집어들었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전적 '작가 소설'의 반복인 듯해서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초기 단편과 장편에서는 예전의 그 거친 느낌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반대로 중후기 장편을 먼저 접했던 독자라면 이질감마저 느끼지 않을까.


초기의 작품이므로 여기서도 몇 가지 유사한 주제가 반복된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과 "공중 괴물 아구이"는 외관상 무해해 보이는 '일'이 의외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남의 다리", "사육", "돌연한 벙어리"와 <새싹 뽑기>는 폐쇄 공간 거주자의 경계와 불신이 공감과 애정으로 변모되다 역시 의외의 결과로 맺어지는 내용이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역시나 최연소 아쿠다가와상 수상 기록을 세운 중편 "사육"이다. 전쟁 중 고립된 산간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떨어지며 흑인 병사가 생포되고, 주인공 소년이 사는 집에 쇠사슬로 묶인 채 제목 그대로 '사육'을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 비하면 최근 아쿠다가와상 수상작이라는 "괴테" 어쩌구는 솔직히 애들 장난 같은 느낌이다.


<새싹 뽑기>도 전쟁 중에 외딴 산간 마을로 피난한 소년원 아이들이 뜻하지 않은 고립 생활을 하면서 불신과 적의, 음모와 죽음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어두운 세계를 엿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른바 '아이들만의 나라'라는 이상과 현실의 충돌과 파국이라는 점에서는 <십오 소년 표류기>에서부터 <파리 대왕>을 비롯한 갖가지 유사한 소재의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극우 사상에 경도되어 좌파 정치인을 살해한 열일곱 살짜리 소년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세븐틴" 역시 인상적이었고, 어찌 보면 민주화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 중에 극우 동조자가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주목할 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 작품과 이후 더 큰 논란을 빚은 속편 때문에 한동안 극우 지지자의 표적이 되었다 한다.


급기야 극우 지지자가 오에 겐자부로의 자폐증 아들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는데, 재발을 우려해 차마 공개하지도 못했던 이 사건의 충격이 컸던지, 이후의 '백치 아들 서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었던 모양이다. 약력상 1961년 아들 히카리의 출생 시점부터 대략 작가 경력의 중기가 시작되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대표 장편소설이 이즈음 발표된다.


이때부터 반복된 사소설과 현학성이 저자 나름대로는 불행한 가정사를 숙고하고 반추하며 일종의 해답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의 거칠고 예리한, 심지어 폭력과 엽기가 돋보인 소재와 내용에 비하면 아무래도 필봉이 무뎌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사상이나 인간으로서는 더 성숙해졌을지 몰라도 이야기꾼으로서는 영 아쉬워졌다고나 할까.


고려원 전집이 중단된 이래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한동안 에세이 위주로만 간행되는 듯하더니, 여러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간행하면서 이제 다시 대표 장편이 재간행되고 있다. 고려원에서 나왔던 것은 물론이고 근간 예고만 되고 못 나온 것도 간행되었으니, 잘만 하면 전작 번역도 가능하겠지만, 일부는 또 그 사이에 다시 절판된 모양이니 쉽지는 않겠다.


아울러 작품 수도 많은 데다, 일본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인지도에 비해 대중성은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작가이니, 어찌저찌 대표작이 간행되더라도 초기작보다는 중후기의 작품 위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우후죽순으로 나왔던 번역서도 대부분 중후기에 편중되었고 초기 작품은 비교적 드물었던 것도 그래서였나.


이런 현실을 감안하고 보자면, 초기 대표작을 여럿 수록한 저자의 자선(自選) 중단편집의 번역서인 현대문학의 <오에 겐자부로>는 이 저자의 초기 활동을 알 수 있는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이 작가의 역량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왔던 나귀님으로서는 특히나 속이 다 시원한 느낌이다. 물론 중후기 장편은 아직 그리 끌리지 않는다만서도...



[*]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해설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앞서 언급한 린즐리 캐머런의 책이 '백치 아들 서사'가 지배적인 중후기 작품 세계를 엿보는 창문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지 않나 싶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마저도 절판인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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