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장을 정리하다 지난번에 구입한 시어도어 그레이의 <세상의 모든 원소 118>를 다시 꺼내 뒤적여 보니 의외로 오역이 많아서 놀랐다. 제목 그대로 원소 118종의 실물과 가공품을 다양한 사진으로 소개한 화보집이어서 구매 직후 그림만 대강 살펴보고 집어넣었는데, 이번에야 해설과 캡션을 꼼꼼히 읽어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속출하기에 이상하다 싶었다.
아직 완독한 것까진 아니지만 '마이트너륨은 리제 마이트너가 발견했다' 같은 확실하고도 멍청한 오역 몇 가지만 눈에 띄는 대로 원문을 찾아서 대조해 보았더니 문제가 꽤 심각했다. 툭하면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정말 생각 없이 옮긴 모양인데, 공짜 알바할 생각은 없으니 알라딘 미리보기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것 두 개만 지적해 보자.
"수소" 장에서 이 원소를 채운 비행선 힌덴부르크호 폭발 사고를 설명한 다음, "그후 연료는 덜 위험한 가솔린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15쪽)고 썼는데, 저 비행선에서 수소의 역할은 연료가 아니라 풍선을 채워 양력(揚力)을 제공한 것이므로 완전 잘못된 설명이다. 정확히 옮기면 "휘발유를 채운 차량보다는 수소를 채운 차량이 오히려 덜 위험하다"는 뜻이다.
비행선 관련 오역은 "헬륨" 장에도 있다. 수소를 헬륨으로 바꿀 경우 "가격이 비싸다는 점과 이 때문에 사용 빈도가 낮다는" 게 문제라며, "이 인기 없는 모델로 함께 드라이브하러 갈 사람?"(17쪽) 하고 뜬금없이 묻는데, 정확히 옮기면 "문제는 가격이 비싸다는 점과 양력(揚力)이 덜하다는 점이다. 높이 날지 못하는 비행선을 굳이 탈 사람이 있을까?"란 뜻이다.
결국 번역자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소설을 써놓은 셈이다. 왜 수소 이야기를 하다 휘발유 이야기가 나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나아가 수소와 대조적인 헬륨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라도 했다면 의외로 쉽게 정답을 알아내지 않았을까. 결국 숙고도 부족하고 정성도 부족한 채로 부실하게 번역된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2010년에 초판이 간행된 이래 2012년과 2023년에 '개정판'이 두 번이나 나왔다. 하지만 위에 지적했듯이 페이지마다 오역이 한두 개씩 나오는 상황이니, 도대체 뭘 개정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기껏해야 구판의 "2개"를 "두 개"로 바꾸고 "우리가 오늘날"을 "오늘날 우리가"로 수정한 정도이니, 결국 '개정판'은 가격 인상을 위한 핑계에 불과해 보인다.
번역자는 한 명이 아니라 '꿈꾸는 과학'이라는 단체이다. 과학자 정재승이 주도한 과학 애호가 모임이라는데, 결과만 보면 사실상 실력도 없는 아마추어들이 좋은 책 하나를 망쳐놓은 셈이 되었으니 괘씸한 일이다. 실력도 정성도 없는 번역자도 문제이지만, 과학 전공자도 아닌 나귀님조차도 쉽게 눈치챈 오류를 15년째 방치한 출판사도 괘씸하긴 마찬가지고...
[*] 시오도어 그레이의 약력을 보니 물리학자 스티븐 울프럼과 함께 울프럼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였다는 내용도 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역사를 서술한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을 보면 울프럼은 약관의 나이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천재 소년으로 묘사되는데, 이후 울프럼 연구소를 설립하고 과학 연구용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 쪽으로 진출했다고 알고 있다. 무려 1200쪽에 육박하는 저서 <새로운 종류의 과학>이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확인해 보니 그것도 이제 사반세기 전의 일이고, 저자도 모두의 흥분과 기대만큼 혁신적인 돌파구는 아직 만들지 못한 채 60대 노인이 되었으니 사람 앞날은 모를 일이다. 그레이는 이후 울프럼 연구소를 떠나 과학 저술과 원소 수집으로 소일하는 모양이니 재미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취미로 원소를 수집하는 사람이다' 정도인 셈인데, 자기가 수집한 물건을 책이나 기타 콘텐츠로 재가공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수집가의 바람이자 목표이자 이상이자 '환상의 마로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나저나 원소 책부터 번역이 이렇게 개판이니, 줄줄이 번역된 나머지 책을 펼쳐 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가격이나 싸면 한 번 속아보는 셈이라도 치겠지만, 하나같이 화보집이니, 이건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