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이맘때면 편의점에서 2리터짜리 생수 여섯 개짜리 한 묶음을 사다가 계단에 놓아둔다. 수돗물 끓여 마시는 나귀님이지만, 혹시나 공사나 동파 등으로 수도가 끊길 때를 대비해서인데, 노파심인가 싶다가도 딱히 비싸진 않으니 사다 놓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작년에 산 생수 여섯 개는 다행히도 쓸 일이 없었으니, 이미 지난 유통기한이 더 지나기 전에 마셔야겠다.
작년 9월 초에 생산된 생수이니 1년짜리 유통기한은 이미 지난 상태이지만, 그늘진 곳에 보관했으니 불과 한 달 사이에 크게 변질되었을 것 같진 않다. 보관만 잘 하면 몇 년이 지나도 끄떡 없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렇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샀다가 결국 반품했다던 이끼 떠다니는 생수는 도대체 어떻게 보관을 했던 건가 문득 궁금해진다.
기껏해야 며칠 분량에 불과한 생수를 준비했을 뿐이니, 이른바 '생존주의' 유형의 본격적인 재난 대비 태세에는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전쟁의 위협이 지금보다 더 실제적으로 느껴졌던 냉전 시대의 기억이며, 사회 기반 시설이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았던 개발 시대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한 나귀님으로선 은근한 불안감을 최소한의 투자로나마 달래려는 셈이다.
최근 서울 곳곳에서 땅꺼짐 발생이 빈번해졌는데, 일각에서는 상하수도 시설이 대대적으로 설치된 지 반세기쯤 되어 노후화한 영향도 없지 않다는 진단이 나왔다. 나귀님도 집 근처 산책로를 걷다 보면 굵은 나무 뿌리가 콘크리트며 보도블럭을 부수고 솟아오른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되니, 꾸준히 관리하지 않으면 인공물이 자연에 압도당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과거에는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 물이 펑펑 나온다'는 것이 도시 생활의 장점으로 선전되었는데, 사실은 항상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만 데워주는 보일러는 한참 뒤에 나왔고, 공사로 인한 단수도 흔했으며, 기껏 나오는 수돗물도 소독약이나 쇠녹이 섞여 못 쓰게 된 경우가 있었고, 고지대에서는 수압이 약해서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어도 졸졸대며 나오곤 했었다.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에는 경쟁자들의 무시와 행패로 고생하던 난쟁이 수도공이 자기를 믿어준 어느 주부에게 고마워하며 '다른 집보다 더 빨리 수돗물을 받을 수 있도록' 마당 수도꼭지를 일반적인 높이보다 더 낮게 설치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 와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 장면도 제아무리 서울의 상수도라 한들 항상 믿기는 어려웠던 시대의 유물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사대강 사업을 추진하며 내놓은 명분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도 이른바 '물 부족 국가'라는 주장이었다. 여름 강수량만 보면 사실이 아닌 듯하지만, 단기적인 집중호우는 늘어나도 식수와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지자체가 적지 않다고 보니,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주장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걸 운하로 만들자는 발상이었지만.
다만 사대강 사업 논란의 영향인지, 정작 수자원 관리라는 필수 과제에 대해서는 중앙 정부며 지자체에서도 그간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이번 강릉 가뭄 사태의 발생과 전개를 지켜보니 이런 우려도 그리 틀리지 않았던 듯하다. 대도시 한복판에 살아가는 나귀님도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려 노력하는데, 공무원들이 너무 무책임하지 않았을까.
이번 강릉 사태와 비교되는 것이 비슷한 환경에 놓였지만 수년 전부터 미리 대비해서 지하수 등 수자원 확보에 성공했다던 이웃 도시 속초의 사례이다.(하지만 여기는 바가지가 문제라지). 반면 대통령과 도지사 앞에서도 딴소리만 늘어놓다 질책당하는 시장의 모습을 보면, 강릉에서는 정말 아무 생각도 행동도 없이 지내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손을 내미는가 싶다.
지난번 SK와 KT의 해킹 사태에서부터, 지난 주말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고에 이르기까지, 국민에게 대규모 피해를 야기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사실상 관련자의 무책임과 태만이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그래서이다. 대형 사고의 원인은 대개 어이 없을 만큼 작고 기본적인 부분을 소홀히 해서인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그나마 강릉에서는 최근 비가 많이 내려 해갈이 되었다더니, 이제는 여기저기 손을 벌려 얻어 놓은 생수 수백만 병이 처치곤란으로 떠올랐다고 전한다. 뭐가 고민일까? 당장 내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 집집마다 나눠주고 잘 보관하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래야 내년에도 생수를 변기물로 사용하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