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앨러모스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금고털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건 단순히 외모나 성격에서 유래한 별명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건물 곳곳의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남의 금고 문을 따고 다녔기 때문이다. 무려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일급 기밀 서류가 하나같이 잔뜩 들어 있는 금고 문을 말이다.


그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자기 사무실에 있는 금고의 잠금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서 뜯어보게 되었고, 원리를 이해하고 나자 청각과 촉각을 동원해 다이얼 맞추는 방법을 연습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다른 금고에도 적용되는지 시험해 보았고, 신형 금고가 들어올 때마다 응용 방법을 궁리하다 보니, 어느새 준 전문가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료들을 놀려주는 용도로만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일급 기밀을 다루는 사무실의 보안 수준이 낮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한 번은 고위직 사무실의 대형 금고를 불과 몇 분 만에 열어서 관련자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는데, 평소처럼 근무자들이 사무실 금고를 열어 놓은 채로 일하면 비밀번호가 유출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파인만은 과거 경비가 삼엄했던 로스앨러모스의 철조망에 인부들이 뚫은 개구멍을 발견하자, 그 사실을 직접 신고하는 대신 일부러 초소를 거쳐 나갔다가 개구멍으로 들어오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경비원의 주의를 끈 적도 있었다. 장난기 다분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뭐든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던 평소의 교육 신념과도 일맥상통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고위직 사무실의 대형 금고를 여는 시범 직후에 새롭게 내려온 보안 강화 지시로 인해 생겨난 의외의 결과에 파인만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파인만 교수가 다녀간 사무실에서는 반드시 금고 번호를 바꾸라'는 신규 업무 지침을 귀찮게 생각한 근무자들이 그 다음부터는 파인만이 문간에 나타나기만 해도 '들어오지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기 때문이다.


수백수천억의 예산이 들어가는 일급 기밀 정부 사업을 더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타당한 지적에도, 정작 실무자들은 전반적인 보안 수준을 높이는 대신 '파인만만 들여놓지 않으면 된다!'는 편법으로 반응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더 황당한 것은 이런 식의 보안 불감증이 무려 80년 뒤인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정부 기관에 만연하다는 점이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일급 기밀 정부 사업이 진행 중인 사무실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금고털이를 취미로 삼았던 물리학자야말로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간주될 법도 하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근무자가 금고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긴급 상황에서 열쇠공 대신 파인만을 불러 해결한 경우도 많았다니, 대부분의 동료들에게는 '걸어다니는 열쇠꾸러미'로 요긴하지도 않았을지.


하지만 "금고털이" 파인만도 독학으로 기술을 터득한 아마추어였기에, 나중에 로스앨러모스에 상주하게 된 전문 열쇠공이 대형 금고를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쇠공은 금고를 여는 기술을 전혀 모른다며 손사래쳤고, 도리어 "금고털이"의 소문을 익히 들었다며 파인만에게 기술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지난번 금고는 어떻게 열었냐고 묻자, 열쇠공은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즉 공장 출하 시 금고의 비밀 번호는 보통 0000이나 1111로 단순하게 정해져 있는데, 문제의 금고에서도 혹시나 해서 그 번호를 입력해 보았더니만 손쉽게 열리더라는 거다. 파인만이 혹시나 싶어 또다시 사무실마다 돌아다녔더니 정말 다섯 중 하나 꼴로 열렸다던가.


지금 새삼스레 이 일화를 떠올린 까닭은, 얼마 전 난리 난 보증보험 해킹 사고에서 통신 장치의 비밀번호가 공장 출하 시 설정인 0000 그대로였다는 조사 결과 때문이다. 최근 거대 통신사를 비롯해 곳곳에서 보안 사고가 빈발하는 상황이니, 어쩐지 앞으로 그 분야 종사자에게는 파인만 책이 필독서가 되어야 할 듯하다. 물론 뭐든지 알아도 안 하는 게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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