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1982년 영화 <문라이팅>은 폴란드인 노동자 네 명이 관광 비자로 런던에 입국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관광이 아니라 인테리어 공사였다. 당시 폴란드 물가가 영국 물가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영국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보다 비행기 표를 주고 폴란드인 노동자를 불러와서 일을 시키는 편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종종 외출하여 자재며 식품을 구입하는 사이, 나머지 세 명은 집안에만 머무르며 기한 내에 마무리하기 위해 공사에 돌입한다. 하지만 예산이 빠듯해지고 자전거를 도둑맞는 등 예상 못한 변수가 줄줄이 등장하자, 주인공은 필요한 물건을 훔치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불사하며 아슬아슬한 작업을 이어나간다.
그 와중에 고국 폴란드에서는 정세 불안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났는데, 주인공은 공사 일정에 악영향을 줄까 싶어 뉴스를 보고도 동료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얼버무린다. 결국 일행은 예정대로 공사를 마무리하고 각자 짐을 실은 쇼핑 카트를 밀며 공항까지 걸어가지만, 뒤늦게 고국의 상황을 파악한 듯한 동료들에게 주인공이 멱살 잡히는 장면으로 끝난다.
1982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국내 개봉은 불발되어 뒤늦게야 TV로 감상한 이 영화의 줄거리를 오랜만에 떠올린 까닭은 며칠 전 미국 조지아 주에서 벌어진 한국인 대거 체포 소식 때문이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저 안하무인의 트럼프 정부가 자행한 또 다른 월권 행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취업용이 아닌 비자로 미국에 가서 일한 것이 문제라나.
그간의 우호적인 한미 관계며, 최근의 관세 협정으로 결정된 한국 기업의 미국 내 대규모 투자 등을 감안하면 솔직히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볼멘 소리를 낼 만도 해 보이지만, 또 일각에서는 영화 <문라이팅>처럼 한국 기업이 그간 비용 절감 등을 위해 현지 인력을 고용하는 대신 한국 인력을 파견하는 편법을 일삼았다는 교포 사회의 쓴소리도 나오는 모양이다.
애초에 여권이며 비자라는 제도는 국가가 개인을 감시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개인의 정체성과 국가의 위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뉴스에서도 해외 여권 영향력 지수에서 한국이 최상위권으로 평가되었다고 보도했었는데, 새삼스레 수백 명이 편법을 쓰다 불법 이민자로 체포되었다니 민망할 수밖에.
어쩌면 이것도 기존 질서를 일일이 깨부수며 혼돈을 야기하는 트럼프 정권 치하의 새로운 현실이니 감내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하간에 애초에 편법을 쓴 것은 잘못이니 할 말은 없어 보인다. 하다못해 러바오와 아이바오도 한국에 올 때에 청두 소재 한국 영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연수 비자를 받았다고 하니, 이건 졸지에 사람이 판다보다도 못한 현실이 아닌가!
최근 노란봉투법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놓고 말들이 많은데, 사실은 이런 원포인트 입법에 앞서서 준법 정신이나 챙겨야 하지 않을까. 법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해당자들이 그걸 지킬 마음이 없는 게 문제인 듯하고, 그중에서도 각종 졸속 입법을 일삼는 국회의원들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준법 정신이 희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문제인 듯하니 말이다.
물론 감방에서 속옷 농성 중이라는 전직 대통령이며, 그런 작자의 인권조차 챙겨주라는 극우 세력이며, 그 와중에 성추행은 범죄가 아니라는 강남 좌파들이며, 또다시 자체적으로 조사해 결정한 품질 표시 기준에 미달하는 중고 서적을 팔아먹어 반품하게 만든 알라딘까지, 세상 어디에도 법과 규칙을 준수할 생각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만...